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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장에 남은 신발을 헤아릴 때

연장보육을 하는 부모의 마음

by 미지의 세계

우리 아이들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은 오후 5시 20분 전후다. 4시 이후까지 어린이집에 머무는 일명 '연장 보육'까지 마치고 온다. 오후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머무는 아이들은 꽤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늦게 하원하는 편이다.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 습관적으로 신발장을 훑어본다. 거의 텅 빈 신발장에 우리 아이들 신발들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간혹 아이들의 신발 말고도 다른 신발들이 함께 놓여있을 때가 있는데 그건 어느 세 자매의 것이다. 선생님의 외침 "엄마 왔다~" 소리에 우리 아이들이 막 달려오면, 그 뒤로 세 자매가 종종 따라 나온다. 해맑은 미소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찌른다. 우리 아이들도 가장 늦게 가는 날에는 저렇게 나를 기다리면서 신나게 뛰어나왔다가 다른 아이가 부모와 집에 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나 싶다. 조금은 쓸쓸한 표정으로 서 있을지도 모르겠고.



부모가 둘 다 휴직 중인데도 아이들의 하원 시간이 늦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일단 3~4시 즈음에 하원해도 어딘가에서 놀아야 한다. 아이들은 남은 에너지를 몽땅 쏟아내야 집에 들어가서도 평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매일 그렇게 밖으로 나들이하기가 어렵다. 갈 곳이 마땅치 않을 뿐만 아니라 날씨나 기온도 고려해야 한다. 일단 너무 덥거나 추우면 야외 놀이터에선 놀 수 없는데, 시골의 실내 놀이터는 읍내 공공센터 몇 군데가 전부다. 그마저도 매일 가기엔 지루하고 아이들은 금세 싫증을 낸다. 그럴 바에는 어린이집에서 좀 더 놀고 오라는 마음이다.


이래 저래 길게 썼지만 사실, 아이들이 늦게 하원하는 것은 우리 부부의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일단 나의 배우자는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그에 따른 헌신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어 한다.


"애들 어린이집 원아들은 대부분 연장보육 한대. 그럼 그냥 거기서 노는 게 낫지. 우리도 좀 더 쉬고 말이야."


어른으로서 편리함을 우선으로 한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잠시 걸려 멈췄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일을 하나 보지. 아이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는 게 정서 발달에 좋지 않을까? 우리는 둘 다 집에 있는데 왜 굳이 아이들을 더 오래 시설에 놔둬."


그러면 곧 이런 말이 돌아온다.


"그럼 네가 다 보면 되겠네."


이 말에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벼운 말이 마음에는 돌덩이처럼 내려앉는다. 잠시 말이 없자 그가 말을 이었다.


"몇 시간 더 어린이집에 있는다고 정서 발달에 큰일이 있겠어?"


음. 그런가.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릴 그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는가. 보통은 청소를 하고 쉬엄쉬엄 저녁 준비를 한다. 물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 주기도 하지만 직접 요리를 해서 온기가 남아있는 음식을 대접하려고 노력한다. 메뉴는 매일 바뀐다. 그런 노력이 꼭 언제나 통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좋은 요리를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저녁을 준비하며 종종 상상한다. 일찍 데리러 와서 함께 놀아준 뒤 대충 차린 밥을 내어주는 엄마, 그리고 늦게 데리러 오지만 따뜻한 밥을 내어주는 엄마 중 아이들은 어느 쪽을 더 좋아할까 하고.


이런 이야기를 직장 동료와도 나눈 적이 있다. 그 동료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상태였는데, 일을 하다 보니 동료의 아이도 어린이집에서 늦게 하원하는 아이 중 하나라고 했다.


"선생님, 나는 애기 데리러 갈 때 그렇게 신발장을 훑어보게 되더라. 우리 애 신발만 덩그러니 있을 때 정말 미안해."


마주 앉은 동료의 입에서 나의 생각과 똑같은 말이 나왔을 땐 정말 반가웠다.


"그렇죠? 정말 죄책감이 들어요."


내가 반색하자 그가 말했다.


"근데 내가 다른 선생님한테 그런 고민을 말하니까 그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그런 값싼 모성애에 힘들어하지 말고 에너지를 아껴서 나중에 아이에게 더 잘해주라'고 말이야."


동료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이미 초등학생 자녀들을 둔 선배 엄마다. 우리는 마주 보며 한참 웃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완벽한 엄마가 되려는 압박에서 잠시 벗어난 것 같달까. 그날은 목이 쉬어가도록 책도 읽어주고 아이들이 웃다 지쳐 잠들 때까지 놀아줬다. 그것이 값싼 모성애를 대신할, 값진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여전히 오후 5시 20분에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간다. 가서는 출입구 한 편에 있는 신발장에서 남은 신발을 훑어본다.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는 그걸 죄책감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으로 바꿀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반갑게 달려와서는 폭 안기는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신발을 내려 신긴다. 자그맣고 부드러운 손들을 잡고 어린이집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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