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숨과 함께 뱉은 고백
아침 8시 30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서둘러 짐을 싼다. 가방에는 각종 세안 용품과 수영복 등 수영 용품, 그리고 갈아입을 옷들이 차곡차곡 담긴다. 정해진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법 분주하게 준비한다. 오늘은 바로 '자수'하러 가는 날이다.
무슨 죄를 고백하는 데 운동 갈 준비를 하는가. 사실 '자수'는 자유 수영의 줄임말이다. 강습 듣는 날이 아닌데도 자율적으로 수영장에 가는 걸 '자수'라고 한다. 별 걸 다 줄인다 싶으시겠지만 수영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쓰는 말이다. 헬스를 30분, 40분가량 하고 자유 수영을 1시간 정도 하는 게 수영 강습 없는 날 나의 오전 루틴이다. 개운하게 샤워까지 마치고 점심을 먹으면 그만한 천국이 또 없다.
거의 매일 할 만큼 수영이 매력적인가. 그렇긴 하다. 그런데 자유 수영은 특히 강습을 듣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 배운 내용을 몸에 익히려는 노력이 필요해서다. 특히 새로운 지식은 반복 없이는 절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음. 방금 이 앞에 다섯 문장이 너무 잘 써져서 무슨 일인가, 내 머릿속에 드디어 영감의 요정이 왔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진실을 곧 깨달았다. 학창 시절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여서 익숙한 거였다. '복습만이 살 길이다! 복습을 잘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어!' 어릴 땐 잔소리 느낌이었는데, 커 보니까 공부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어느 곳에나 통용되는 만능 잠언임을 깨닫는다. 역시 어른들 말은 새겨들을 부분이 많다.
아무튼.
수영을 하러 가면 강습을 같이 듣는 언니들이 풀장에서 인사해 준다. 나처럼 수업 내용도 복습하고 운동하러 나온 것이다. 수업도 없는데 어떻게 자주 마주치나 싶지만, 사실 사람의 생활 패턴은 한번 정해지면 잘 안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오전 10시 전후는 나와 몇몇 사람들에게 '수영하는 시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면 보통은 비공식 수영 강습이 열린다. "자기는 아까 보니까 팔이 잘 안 올라가더라." "나는 저 끝에서 돌아 나올 때 숨이 잘 안 쉬어져." 서로의 고민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다 같이 서로의 수영 자세를 봐준다. 대략 1시간쯤 지나면 어느 누군가가 외친다. "이제 나 마지막으로 돌고 나갈게. 자유형으로 2바퀴만 돌고 갈까?" 그럼 알록달록 수모들이 흔들흔들, 줄지어 나란히 물 위를 떠 간다.
운동으로 유대감이 생기는 건 얼마나 건강한가. 모두가 오로지 '좋은 수영 자세'에 대해 토론하며 함께 잘 어울리면 기분이 참 좋다. 그런데...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수강생이 서로를 알려주는 문화를 많이 선호하지는 않는다. 조언도 반갑고 고맙지만 너무 많은 말에는 정신이 흐려진다. 일단 내가 피드백을 주는 입장일 경우엔 이렇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닌데 괜히 잘못된 방식을 조언해 줬다가, 그 사람이 더 힘들면 어떻게 할까 걱정된다.
그리고 평소에 말도 조심하는 편이라 단어를 고르는 게 신경 쓰인다. 운동은 즐겁자고 하는 것인데 간혹 서로 조언을 해주다 보면 얼굴 붉히게 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언니 A와 B가 서로 자세를 봐주다가 A 언니가 저 멀리 나아갔는데, 다른 언니가 "저 사람한텐 배울 게 하나도 없어. 그냥 듣는 척만 해." 했다. 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그냥 어색하게 웃었는데, 멀리 갔던 A 언니가 오고 내 옆에 있던 언니가 출발하자 A언니가 말했다. "자기는 잘 못하면서 남한테 지적질이야."
또 어떨 때는 나에게 조언을 부탁해 놓고, 내가 몇 마디 하니 이런 말을 한 언니도 있었다. "그래, 그래. 자기가 선~수니까 말 들어야지. 알겠습니다~!" 너스레에 가까운 장난이었지만 이런 대화를 주고받자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색해지는 게 사실이다.
가르침을 받는 입장도 그렇다. 알려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걸 꼭 잘 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에 사로잡힌다. 그러면 몸도 더 빳빳하게 굳고 내 페이스대로 운동을 하지 못한다. "다시 해 봐!"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려주려는 수강생도 있다. 머리는 이해했는데 몸이 쉽게 못 따라가면 나도 민망하고, 임시 선생님도 민망하다. 오히려 실제 강사한테는 '난 학생이고, 배우는 입장이다. 강사님은 나처럼 잘 못하는 수강생도 많이 봤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어서 편하다. 누군가에게 나의 역량을 증명하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나는 수강생한테 가르침을 받고 오는 그 시간을 거치고 나면 어느 때보다 많이 지쳐있다.
그런 데도 왜 자유 수영을 가는가? 일단 수영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 좀 거칠게 말해보자면 물놀이를 하는데 운동도 되는 기분이라고 할까.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쾌적한 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자유 수영을 하지 않은 날엔 티가 난다. 다음 날 수영을 다시 해볼라 치면 몸이 무겁다. 고작 하루 빠진 것뿐인데 그렇다. 더 물에 빠지는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건 기분일 뿐이다. 고작 하루 안 했다고 몸의 변화가 느껴질 리 없다. 이 정도로 예민하다면 내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 단순히 입이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즐기고 있는 빵과 맥주를 먹지 말아야 한다. 몸이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신한 건, 달라질 것 없어 보이는 무언가도 매일 하면 분명히 나아진다는 것이다. 물에도 잘 못 떠서 허우적 대던 게 9개월 전인데, 이제는 자유자재로 물살을 가르는 것처럼. 강습받지 않는 날 수영을 하지 않으면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실력이 제자리이거나 더 나아지지 못하리라는 건 확실하다.
오늘도 수업은 없지만, 수영을 하러 간다. 물속에서 손을 저으면서 고백한다. 사실 오늘 오기 싫었습니다. 몇 번이고 차를 돌리려고 했어요. 방금 노하우를 알려 준 언니가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조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움직이니까 정말 좋네요. 어제 안 됐던 자세가 오늘은 되었다 안 되었다 하니 그것도 재미있네요. 수영하기 전까지 저지른 자질구레한 잘못과 잡생각을 날숨과 함께 뱉는다. 참 시원하다. 개운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수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