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에서의 마지막 밤
잔뜩 쇼핑해온 물건을 내려놓고 한시장에서 사 온 망고를 시원하게 먹기 위해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 꼭 해야 하는 일정은 다 마친 상태. 남은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하다 체크인 시 문제가 생겨 받았던 루프탑 이용권을 사용하기로 했다.루프탑이 꽤 괜찮다는 후기를 보았기에 어찌나 기대했는지!
가장 더운 시간, 루프탑 수영장에는 한국인 가족이 한가로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페에도 몇 테이블의 손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용권을 직원에게 보여주니 1인당 음료 한 잔, 케이크 한 조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티라미수와 치즈케이크 그리고 커피와 허브티를 주문한 후 자리를 잡았다. 실내는 에어컨 바람으로 정말 시원했다. 다낭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쾌적함이었지만, 창으로 막힌 시야가 불편해 조금 덥지만 야외로 나갔다.
눈앞에는 미케 비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탁 트인 풍경에 마음도 뻥 뚫리는 느낌!! 이렇게 고민 없이 여유롭게 앉아 있으니 이곳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 났다. 돌아가야 하는 것이 싫었고 다음 여행은 언제일지 모른다는 것이 아쉬웠다. 원래대로라면 바나힐 투어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바나힐에 갔다면 이런 여유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분주히 걷느라 지친 상태로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알록달록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 해준 디저트의 모습과는 달리 맛이 없어 결국 남겼다. 시간은 왜 이리 빠른지 어느덧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이 왔다. 마지막 날이 되니 속이 더부룩해서 느끼한 베트남 음식이 꺼려졌다. 검색 끝에 다낭 시내의 가정식으로 유명한 음식점에 가기 위해 그랩을 호출했다.
호텔 로비에 잠깐 앉아 그랩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희 어디가??"
벨보이였다. 어제 바나힐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던 그 벨보이. 저녁 먹으러 간다고 했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처음 만났을 때 환하게 웃어주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뾰로통한 모습이었다. 바나힐을 가지 않는다고 했더니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방금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것 같았다. 시내로 이동하면서도 벨보이가 잊히지 않아 B에게 벨보이의 표정을 봤느냐고 물었다. B 역시 벨보이가 우리에게 단단히 삐친 느낌이었다고 말해 한바탕 웃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엥??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우리가 가려고 했던 식당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 당황스러웠다. 또 어디를 가야 할지 한참을 멀뚱히 서 있었다가 문득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깔깔거리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식당에 걸린 현수막에 요리사의 얼굴이 있었다.
"엇! 백종원이다! 여기도 백종원 식당인가 봐!!"
반가움에 가까이 가 보니 얼굴이 달랐다. 알고 보니 다낭의 백종원이라고 불리는 요리사가 백종원 식당에 걸려 있는 모습을 패러디하여 찍어둔 것! 한국 음식점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한국 음식점에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꼭 여길 가야 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다른 대안도 없을뿐더러 느끼한 속을 잡아줄 수 있는 음식은 한국 음식뿐이라는 생각에 결국 들어갔다.
여행을 가면 현지식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리가 한국 음식점을 찾게 될 줄이야.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한국에서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찌나 고소한지 너무 반가웠다. 가장 매워 보이는 김치찌개와 돌솥비빔밥을 주문하고 둘러본 식당에는 현지인보다 관광객과 외국인이 많았다. 차림새에서 느껴지는 부유해 보이는 중국인이 많았다. 가격이 한국 물가와 비슷한 걸 보니 저렴한 곳도 아니었기에 현지인이 평소에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김치찌개를 내 앞에 내려놓던 직원이 실수로 찌개를 쏟았다. 당황한 그는 '앗!' 하며 쳐다보고만 있자 매니저로 보이는 직원이 와서 한국어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닦아주었다. 한두 번 인사하고 말겠지 했지만 남은 부분은 내가 닦아도 되는데 끝마무리까지 하며 계속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너무 미안해하는 것 같아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다른 테이블의 고기도 신경 써서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서비스가 만족스러웠다.
츄르릅. 국물을 맛보았다. 아뿔싸, 매콤하고 칼칼한 김치찌개가 아닌데? 느끼함을 잡아주길 원했으나 오히려 기름이 둥둥 떠있는 사골 국물에 빨간 고추기름이 떠다니는 느낌. 그나마 김치가 매워서 다행이지. 밥알 역시 인도 쌀로 지은 듯, 한 알 한 알 흐트러졌다. 한국 음식이지만 베트남 식으로 재탄생한 맛. 한국에서 판매하는 베트남 쌀국수를 먹는 베트남 사람들도 이런 느낌일까? 맛은 절대 따라갈 수 없었으나 친절하고 깔끔했기에 번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식사를 마쳤다. 식당에서 냅킨 찾기 힘들었는데 테이블마다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한국 식당의 모습에 매우 만족했다.
밝을 때 들어갔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두워져 있었다. 마지막 밤이니 스타벅스에 가야지! 여행을 간다면 그 나라의 스타벅스는 꼭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이라 필수 코스였다. 편도 4차선 도로 앞에 위치했고, 오른쪽에는 한강이 흘렀다. 반짝이는 한강의 야경은 오늘도 옳았다. 잠시 사진을 찍은 후 스타벅스로 가기 위해 4차선 도로를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멈추었다. 다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어두운 밤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도로가 아니라서 우리만 건너다보니 넓은 차선의 많은 차가 멈추는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웠다.
발을 떼고 4차선을 지나 3차선까지 잘 건넜다. 그러나 2차선의 차들은 우리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너무 빨리 달려오는 차에 기겁해 몇 분을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치일 것만 같은 기분에 너무 무서워서 움직일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차를 보고도 주인공이 가만히 바라만 보는 모습에 억지스러웠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모습이 불쌍했는지 아니면 짜증이 났는지 달리던 차가 멈춰주어 안도하며 잽싸게 건넜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서운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베트남에서는 스타벅스가 기를 못 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제 마신 아메리카노 한 잔이 15,000동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도 자주 찾지는 않을 것 같다. 평소 잘 마시는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한국 가격보다는 몇 백 원 저렴했으나, 베트남 물가로 따지자면 엄청나게 비쌌다. 방문하는 사람들의 90%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야경은 이 밤의 분위기에 더 취할 수 있었다. 이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아쉬움과 설렘,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베트남에 대한 느낌을 공유했고 B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보다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지금 잠이 들면 내일은 바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호텔로 들어가는데 벨보이가 우리를 보고는 문을 여는 둥 마는 둥 이제는 건성으로 대했다. 바나힐에 못 갔다고 바로 이렇게 대하는 모습이 얄미웠지만 내일 떠날 생각에 그냥 올라왔다. 낮에 한시장에서 사 온 망고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아주 시원했다. 호이안에서도 그랬는데 덥고 힘들었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망고를 깎아 먹은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1,500원이라는 돈으로 시원함과 개운함, 달콤함, 상큼함 모두를 느끼니 그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나들이 후 집으로 돌아와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과일을 먹는 느낌처럼 따듯했다.
다낭은 소확행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눈에 넣고 마음에 담아두기에 과하지 않다. 소소하지만 빈번한 행복으로 마음 또한 풍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