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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우 Jan 03. 2024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책이라는 세계

 10대에는 유식해지는 기분이 좋아서 책을 읽었다. 20대에는 소설가의 꿈을 안고 조금이라도 잘 써 보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어쩌면 나는 3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사심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책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어떤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냥 존재 자체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서점원이 되어 본 경험은 책에 대한 사랑에 박차를 가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양과 속도를 보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절로 체감되어 혀를 끌끌 차다가도, 신간 입고 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내려 가 다른 층 책들까지 참견해 가며 열심히 눈알을 굴리곤 했다. 그 시간이 주는 기쁨이 내게는 돈보다 귀했다. 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수많은 책들이 내 앞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시간. 그 기쁨이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나는 그 시간을 한 방울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책을 대하는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셀 수 없이 많은 책들 틈에서 단 한 권을 골라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얼마나 기적 같은 운명이었는지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나의 취향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모든 책을 존중하게 되었고, 또 어떤 책을 읽느냐와 상관없이 모든 독자를 존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장시간 알게 모르게 누적되었던 책에 대한 여러 편견들이 하나씩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 권 한 권을 전보다 더욱 신중히 골라 선택하게 되었고,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장르의 책들도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내 나름대로의 좋은 책과 안 좋은 책 구별법을 정립해 나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값진 시간들을 차곡차곡 흘려 보내며, 책을 아무리 열심히 읽는다 해도 세상 모든 책을 읽을 수는 결코 없다는 자못 당연한 결론 하나를 집어 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평생에 걸쳐 읽을 수 있는 매우 제한된 양의 책들을 어떤 것들로 채워나갈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는 더더욱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책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유익한 정보를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나를 성장시키라고 어깃장을 놓지도 않고, 감동과 재미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의 철저한 주관에 근거하여, 오늘의 기분에 따라 끌리는 것으로 한 권을 집어 들고, 내가 읽고 싶은 만큼 읽다 잠들 수 있다면 책은 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이미 주었다고 믿는다.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한 장씩 넘겨 나가는 기쁨을, 나름의 기준에 따라 선별된 도서들을 한 권 한 권 책꽂이에 채워 넣을 때의 기쁨을, 운명의 책들로 가득한 서가를 바라보며 뿌듯하고 풍요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기쁨을 가능한 한 오래 누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부디 종이책이 영원히 건재해 주길, 출판 시장의 안녕과 종이책 신봉자들의 무운을 빌 따름이다.


 글을 마치려다 보니 책에게 바라는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책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서점원 회고록 끝 -

(이번주 토요일, 본 연재에 대한 후기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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