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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르디우스의 매듭 Feb 28. 2020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

Doing Good Better

 해야만 하는 일을 이야기할 때 개인적인 의무들, 예를 들면, 아빠의 경우 경제적으로 할머니를 보조하는 것(넌 안 하겠지?), 너를 대학까지 무사히 공부시키는 것 등이 가족을 이끄는(사실은 네 엄마가 이끌지만...) 자로서의 '해야만 하는 일'에 속하겠지? 그 외에도 직업인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테고, 사회적 계약에 따른 해야만 하는 일도 있을 거야. 그러나 지금 네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이 다르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또는 네가 나중에 했으면 하는 일이다. 


 아빠는 오래전부터 '유니세프'에 매달 일정액을 기부하고 있단다. 그 외에 회사에서 공동으로 하는 사회연대기금이나 공익재단에도 기부를 하고 있지. 또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에도 작은 돈이지만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고 있다. 아마 월급을 받는 동안은 계속하지 싶다. 어차피 받는 월급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돈이긴 해. 


 노무현 재단에 기부하는 것에 대해 잠시만 옆길로 좀 빠져서 얘기하자면, 그것은 정치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공감과 기억의 의미다. 아빠한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운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그렇게 희망을 던져 놓고 바람처럼 가버려서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미워했다. 근데, 미워했지만 누가 욕하면 발끈했지. 왜? 노무현이 바로 나고, 우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빠와 할머니가 살던 곳을 지역구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서 매번 낙선했었단다. 그의 신념에 늘 미안했지. 그러나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그의 동지들, 그리고 노사모 회원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평범한 나와 우리. 우리의 소망과 희망을 담아 응원했던, 노무현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공이었던 시절이었단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친노, 노빠라며 보수골통들이나 호남 호족들이 몰아붙일 때 늘 불만이었다. '그래, 나 친노고 노빠인데, 너는 왜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 민주주의와 동서화합, 반칙 없는 사회, 돈 없고 빽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사회, 근거 없는 유언비어로 국민을 위협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게 노무현이 선거를 통해 주장했던 것들이었다. 그를 통해 우리가 만들고자 한 것들인데, 오히려 '너는 왜 친노가 아니냐, 너는 그런 사회를 바라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이 뿌린 씨앗을 바탕으로 시민의 힘을 통해, 촛불을 들어 불의를 몰아내고 소위 말하는 보수의 힘을 빌지 않고 당선되었지(그래서 자랑스러웠지만 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키더구나). 그러고 보면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 이 땅에 민주정부를 완성하고자 한 것일까? 그래도 그의 죽음은 미웠단다. 이런 얘기는 관심 없지? 그래도 언젠가 관심을 가지기 바래. 


 다시 돌아와서, 얼마나 부자여야 기부를 할까? <Doing Good Better, 냉정한 이타주의자>의 저자인 윌리엄 맥어스킬에 따르면, 우리의 소득 비교 대상이 현재 우리 사회 안에 머물러 있어서 그렇지, 전 세계 인구로 범위를 넓히면 연간소득 2만 8천 불(네가 이 책을 볼 때의 환율에 따라 다르겠지만 약 3천만 원쯤 되겠지? 그리고 2010년대 기준이니 실제로는 더 높아졌을거야)이면 상위 5%에 해당하고, 5만 2천 불(약 6천5백만 원) 이상이면 상위 1%에 해당한다는구나. 가난한 나라는 물가가 싸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물가수준을 반영해서 그렇단다. 하위 20%에 해당하는 12억 2천만 명은 하루 수입이 1.5달러 미만인 극빈층이다. 심지어 자급자족하는 과정에서 소비하는 부분을 포함해도 그렇다는구나. 자, 지금 얼마 벌고 있니? 이제 기부 좀 할래? 넌 부자 맞아. 우리가 빈곤국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동일한 비용으로 개선되는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돈의 상대가치가 100:1이라고 해서 100배 '선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1,000원을 주는 것보다 극빈자에게 1달러를 주는 것이 100배 큰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윌리엄 맥어스킬은 어설프게 봉사하러 다니는 것보다, 그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열심히 돈을 벌어 기부하라고 주장한다. 물론, 네가 정말 잘할 수 있는 분야라면 직접 하는 것도 좋겠지. 그는 그 책을 통해서 착한 일을 하기 전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되기 위한 질문들을 소개한단다. 예를 들면,  

1. 선택의 득과 실 _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 

2. 당신은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_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가?, 

3. 재해구호에 기부하면 안 되는 이유 _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는가?, 

4. 1억 2000만 명을 구한 사람 _ 우리가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5. 투표는 수십만 원 기부나 다름없다 _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이고,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만들기 위해 QALY(Quality-Adjusted Life Year)라는 개념을 소개하는데, 비용 대비 삶의 질의 개선 정도와 이 개선 정도로 늘어나는 수명을 결합한 수치들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이 수치는 사실 논란이 많아. Quality에 대한 주관적 평가를 하는 것은 어렵거든. 쉽게 말해서 비용 대비 QALY가 낮은 어린아이를 살리는 신장투석 대신에 비용이 작게 드는 할아버지의 고관절 수술을 선택하는 것이 옳냐는 것은 논란이 생길 수 있지. 어쨌든 저자의 의도는 봉사나 기부가 실질적인 효과가 있도록 잘 관찰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보자는 취지야. 결국 우리는 제한된 기부나 봉사활동시간 하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기준이 필요한데, 이러한 기준에 답하기 위한 질문들인 것이지. 그래서 책 제목도 'Doing Good Better', 직역하면 '착한 일을 더 잘하는 법'이라고 했나 봐. 그래서 그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한 봉사나 기부보다 더 효과가 큰 가난한 빈국에 기부하라고 주장하는 거지. 그리고 아빠는 이 대한민국에 이미 많은 세금을 내고 있으니 나름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단다.  


 꼭 기부가 아니라도 네가 하는 일을 성실히 하는 것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그래, 국부론을 쓴 그 사람. 학교에서 배웠니?, 요듬은 '애덤 스미스'라고 발음하니?)가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도덕감정론> 이란 책에서 이렇게 얘기했단다. 


"직업이라는 자기 일을 잘 해 내는 것. 그게 남에게 도움이 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훌륭한 식당 주인은 손님들에게 음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손님들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정과 추억을 공유할 기회까지 제공한다. 만일 한 상인이 재고비용을 낮춰 물건 값을 내린다면 소비자는 전보다 낮은 가격으로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 그 결과 돈에 여유가 생긴 소비자는 휴가를 떠날 수 있고, 자녀에게 음악수업을 받게 하거나 더 좋은 셔츠를 사 줄 수 있다. 혹은 자동차 타이어를 미루지 않고 제때 교체할 수 있다. 결국 소비자는 일할 때도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웃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퍼져, 그들의 하루가 다 같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지만, 이 일들이 끼치는 영향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이게 아담 스미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보이지 않는 손'이지 않을까? 아빠가 
영국에 잠깐 있을 때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여행한 적이 있다. 거기 올드타운 길로 한 참 내려오면 작은 교회 뒷마당에 그의 무덤이 있지. 현대 자본주의의 대부가 누워 있는 무덤 치고는 일견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그때는 몰랐었다.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이 차가운 손이라 생각했거든. 한 참 뒤에야 알았지. 그가 말한 손은 원래 따뜻했는데, 사람들에 의해 차갑게 변한 것이라는 걸.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이렇게 작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다양한 죄들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냥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렴. 이런 일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니? 자기가 직업으로서 맡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수행하고, 받은 월급의 1% 정도라도 기부하는 일. 분명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빠가 말했잖아. 해야만 하는 일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의무'라고. 우리가 가진 것에 늘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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