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적립된 압박이 만기임을 알리는 징후가 나타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가끔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서 늘 하던 일을 하는데 숨쉬기가 어려웠다. 옆자리 동료에게 이야기를 하니 "그거 공황장애 초기 증상 아니냐?"라고 묻는다. 비정기적으로 가끔씩 찾아오는 증상이라 그 정도는 아니겠거니 넘겼지만 이미 내 삶은 피폐했고,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켜켜이 쌓여 빈틈을 찾기 힘들었다. 워킹맘 8년 차, 두 아이를 키우면서 회사생활을 병행하고 나서부터가 시작일까? 눈 뜨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쳐내면서 살아가기 바빴지만 나는 엄마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숨쉬기가 어려운 날들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 우리 부문을 총괄하는 임원이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유추해 보았을 때 오늘도 그의 기분인 바닥을 찍은 듯했다. 촉각을 다투는 업무, 이해관계자가 많은 부서 특성상 팀 분위기는 긴장도가 팽팽하게 유지되는 날들이 많았다. 이날 급한 회의 소집 이유는 '팀 기강이 흐트러졌다'라고 모두를 나무라기 위해서였다. 긴장된 분위기와 가끔 높아지는 언성. 이야기를 자세히 듣자니, '설마 나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구심이 들었다. 얼마 전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났다. 아픈 아이를 어린이집에 바로 보낼 수가 없어 병원에 들렀다 출근한 것이 화근이 아닌가 싶었다. 회의가 끝나자 팀원들은 삼삼오오 회의실을 나서며 작은 목소리를 불만을 토로했지만 나는 입이 무거워졌다.
둘째를 낳고 복귀하며 입주도우미를 구했던 것은 내가 일하는 직무, 조직의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선후배 동료들에게 불편함을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끔 어려움을 토로하면, 내 주변 대부분 남자 동료들은 함께 일을 봐주는 도우미 이모님도 계시는데도 징징거린다며 '복에 겨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또 '유난이다'라는 핀잔이라도 들을까 봐 회사에서는 늘 '아무 일 없는 척', '언제든 준비가 돼있는 척'을 했다. 애 둘 낳고 복귀하는 것 자체가 전투력이 떨어졌으니 앞으로 다가올 승진이 어렵지 않겠냐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이 비수로 꽂히기도 했다. '일을 오래 하고 싶은 마음', '나의 커리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욕심인가 싶을 만큼, 보수적인 조직분위기에서 나는 분명 소수자임이 확실했다. 그래도 무던하고 무심한 나의 성격이 오랜 시간을 버티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징후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숨쉬기가 힘든 날이 있는 것 보면 압박이 무심함을 뚫고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회사에서도 전쟁이지만 퇴근하면 더 전쟁이다. 전투육아라는 말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던 중 티브이에서 뉴스를 듣다 순간 얼음이 된 적이 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티브이를 틀어 놓고 전투육아에 한창이었다. 티브이에서 '어느 여자 변호사가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일에 치이며 압박을 받다 싸늘해진 모습으로 욕실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에게는 어린아이도 둘이나 있다고 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갑자기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안타깝고 불쌍하고 슬펐다. 견디지 말고 어려우면 얘기를 해야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지, 왜 견디고 있었을까? 아직 꽃다운 나이 그녀에 사연에 너무 몰입이 되어 머릿속에서 그 사연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그날 나는 결심을 했다. 나의 어려움을 어렵다고, '진짜 힘들다'라고 이야기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