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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twhite Sep 21. 2018

30대 초반 퇴사 일기(5)

망가진 나의 일상

마지막 출근 후 딱 한 달이 지났다. 처음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본부장님은 퇴사 후 계획을 물었다. 그때의 계획은 굉장히 거창했다. 본가로 돌아가 학교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본부장님은 콧방귀를 뀔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일을 그만두고 취업 준비에 올인하겠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왜 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실까 의아했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정말 콧방귀를 뀔 만큼의 가치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태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상 말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날이 9월 2일이다. 시차 적응하느라 하루, 이틀은 잠만 잤다. 그러고 나서 바로 토플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학원을 가려면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래서 2주 나가고 그만두었다. 사실 작년 가을부터 미국 대학으로 박사과정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토플과 GRE를 준비하려고 주말마다 강남 학원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지만 두 달 만에 포기했다. 평일에 회사에서 매일 밤 10시까지 야근하고, 집에 와서 잠만 자고 다시 출근하는 일상을 살았다. 일도 그냥 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에너지를 다 쏟아붓는 강도의 일을 했다. 동료들과의 잡담도 일절 없이 일에만 집중하면서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의 진도를 맞출 수 없었다. 집에 오면 내가 어디서, 어떻게, 언제 잠드는지 몰랐다. 눈을 뜨면 새벽 4-5시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출근하려면 6시 반에 일어나야 한다. 나는 그대로 잠들지 않고 멍을 때리다가 씻고 다시 출근했다. 이런 강도로 약 2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평일을 보내면서 주말에도 쉬지 못하니 몸이 버텨낼 리 없었고, 당연히 공부도 되지 않았다. 회사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만이 온 신경을 지배했다.

그렇게 소원하던 퇴사를 했는데, 나는 여전히 멍을 때리고 있다. 퇴사 전에 세웠던 계획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핑계를 대자면 에너지가 없다. 번아웃 증후군이라도 겪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냥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다. 아침마다 집 앞 공원을 달리고 스쿼트도 하며 그동안 못했던 운동을 하는 것만이 규칙적인 일상의 전부다. 오늘은 토플학원에서 중간 테스트를 하는 날이라 참석해야 했는데, 가지 않고 잠만 잤다. 12시에 택배 아저씨가 누르는 벨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일어나서 모카포트에 원두가루를 가득 채워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우유를 데워 거품을 내서 카페라테를 만들어 마시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새벽 6시 반이면 일어나 제일 먼저 한 행동이 커피 내리는 거였는데.., 내가 직접 내린 게 1년 만인 것 같아... 내 일상이, 삶이 망가졌다.’

회사를 그만둬서 아니라,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던 그 어리석은 2년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삶의 허무를 느낄 때마다 일에서 삶을 분리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다. 나의 삶에서 이 일을 잃어도 내가 무너지지 않게, 그런 단단한 뿌리 같은 것들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과 무관한 활동들을 많이 했다. 독서, 글쓰기, 전시, 음악회, 테니스, 동호회 활동 등 다양하게 했다. 2년 전만 해도 이런 것들로 채워가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일련의 활동들을 하면서 이 일이 아니어도, 연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해도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유지하고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일과 회사에서 독립성을 갖추려고 했던 행동들은 그 일 때문에 하나도 손에 남아있지 않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망가진 나의 삶을 재건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 때문에 놓치고 살았던 것들, 좋아하던 것들을 하나씩 찾아오는 일 말이다.   



@ 사진은 부산에서 근무할 때 갔던 곳, 주말을 보내던 나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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