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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twhite Sep 27. 2018

30대 초반 퇴사 일기(6)

가슴이 뛰는 일

나는 브런치에 올린 글의 통계를 자주 확인한다. 특히 “유입 키워드”에 관심이 많다. 추석 연휴 동안 가장 눈에 띈 키워드는 “퇴사 후 대학원 진학”이었다. 키워드를 보고 있자면 다들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사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일을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한 스토리(?)에 대해 적어본다.


대학 졸업 후 첫 입사해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한 곳은 정부출연연구소(이하 정출연)다. 정출연의 약 80% 이상 직원들이 석박사 출신들이다. 흔히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상사로 두었다. 엄청 예민하고 자신의 분야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이 일하기는 매우 힘들다. <미생>에서 그리는 회사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부하직원이나 직급이 낮은 직원들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회사 내에서는 욕을 하거나 듣는 경우도 전무하다. 직설적으로 가감 없이 말하자면, 개진상 떠는 상사는 없지만 박사들의 기준에 맞춰 일하는 것은 그들이 10년 넘게 쌓은 내공과 그 시간에 맞추어 같이 또라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첫 느낌은 정말 그랬다. 그리고 몇 년 간은 박사들이 정말 너무 싫었다. 한 번은 소개팅에 나갔는데 상대방이 박사학위가 있다고 하는 순간, 이상한 여자가 되더라도 당장에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과 그 환경이 싫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대학원 문턱을 기웃거리고 그들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또 닮아갔다.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中

  

한동안 자기 개발서와 미디어에서 숱하게 쏟아내는 프레임이 하나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일을!” 나도 그런 일을 찾아 헤맨 적이 있었다. 입사 후 3년, 퇴사를 계획하고 사표를 던진 나는 대학원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이었을까. 결국 대학원 진학을 접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이 일인지 의심했고 확신이 없었다. 지금은 그때 왜 대학원을 가려고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간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2년의 시간이 더 흘러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니까 입사 후 5년이 지나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때의 나는 첫 퇴사를 고민하던 때의 나와는 달랐다. 나에게는 운명의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장을 뛰게 하고 좋아하는 일의 존재 여부는 애초에 나의 마음에 달린 문제였다. 흔히 셀럽들이 미디어 매체에서 말하는 “저는 어릴 때부터 운동이, 연기가 제 운명인걸 직감했어요.”, 그런 운명은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나 소명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다면, 이미 그들은 그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드림 잡 때문에 고민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5년의 시간이 지났고, 당장 이력서를 쓴다면 경력란에는 “정출연에서 수치해석(나의 주 업무, 프로그램으로 계산하는 일)”이라는 한 줄을 쓸 수 있었다. 5년이 짧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쏟아부은 노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을 못하지도 않았다. 나름 잘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일을 좋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더 잘 해내 보겠다고 다짐했다. 단순했다. 하지만 더 잘하기 위해서는 공부와 학위가 필요했다. 단지 그 결심 하나가 70%가 넘는 연봉 삭감을 감내하게 만들고 나를 대학원으로 보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대학원 생활은 너무 재미있었고 마음만은 행복했다. 그동안 일하면서 몰랐던 이론들을 하나씩 배워가니 저절로 신이 났다. 또 일하면서 바로 적용할 수 있으니 힘들게 공부한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70%의 연봉 삭감 따위 아깝지 않았고, 더 보태서 무일푼이었어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이쯤이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일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 만큼 좋아하는 일을 만났는지.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한다. 나의 전공분야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고 박사들, 교수들과 함께 하는 토론은 나를 설레게 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무작정 가슴 뛰는 일을 향해 퇴사와 다음을 고민하고 있다면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가슴 뛰는 일은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할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고. 도저히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할 마음이 없거나 생기지 않는다면 직업을 계속 바꿔보시라. 좋아할 만한 일을 만날 때까지. 그리고 이미 만났다면 전력을 다해 에너지를 쏟아부으라고 말하고 싶다.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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