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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딸에게 솜사탕 선물이라니

궤도에서 이탈한 딸을 부모는 사랑으로 품어주었다

by 뮤슈만

세계여행을 떠난 부모님이 돌아왔다. 무려 일 년 반 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수십 년간 여행을 꿈꾸던 부모님은 지난해 아빠의 정년퇴임을 기점으로 버킷리스트를 실천에 옮겼다. 가족 단톡방에는 세계 곳곳을 걸어 다니며 대자연을 만끽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부모님의 사진이 매일 올라왔다. 부모의 무게감을 덜어낸 채 세상 곳곳을 구경하는 부모님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밝은 희망을 가득 채워 인생 2막을 시작한 부모님에게 차마 나는 말할 수 없었다. 5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나왔음을, 한창 일할 나이인 내가 궤도에서 이탈했음을. 퇴사했다는 나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기쁨이 가득했던 부모님의 세계여행이 순식간에 걱정과 염려로 뒤덮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우디가 지었다는 대성당을 보며 감탄하고, 자연이 부린 마법에 경이로움을 느끼던 여행길에 자녀의 퇴사 소식이 끼어든다면, 장엄한 건축물과 자연경관은 그저 방황하는 자녀의 재취업을 비는 장소로 변모할 게 뻔했다. 부모님의 여행길이 순례길로 변하는 상황은 막고 싶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여행 기분을 핑계 삼아, 어쩌면 나를 위해 퇴사했다는 사실은 당분간 알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부모님의 귀국 일정이 반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부모님은 여행이 짧게 끝났다는 아쉬움보다는 오랜만에 식구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즐거움이 더 큰 듯했다. 나 역시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이 반가운 건 마찬가지였다. 다친 곳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친 부모님을 보니 안심이 되기도 했고, 중년의 나이에도 뚜벅이 여행을 떠남으로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부모님이 멋있기도 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을 꺼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고백할 날을 잡았다.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가족 식사를 하기로 한 날. 어린이날, 석가탄신일이 겹친 덕에 대체공휴일까지 붙게 된 황금연휴의 시작점을 나의 퇴사 고백일로 정했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을 사고 정갈한 음식을 준비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미루고 미뤄왔던 나의 퇴사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서 발표하듯 이야기할지, 한 장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해서 설명할지 여러 방법을 고민했지만,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퇴사를 결심한 이유, 퇴사 과정부터 지금까지의 생활 경과, 나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목표를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부모님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놀라시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마음과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표출되는 것은 아닐지, 예상했던 여러 모습 중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생각하며 잠깐의 침묵을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발견한 건 옅은 미소. 두 분의 표정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들어준 부모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미 오래전에 내가 회사를 그만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직장인 연차로는 가기 어려운 2주간의 여행을 떠난다는 게 결정적인 단서였지만, 나의 재직 상태를 묻지는 않기로 한 부모님이었다. 대신 두 분은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결정했을 나의 선택, 퇴사 후 보낸 나의 시간을 믿고 응원하겠다고 했다. 나를 위한 덕담으로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무던하게 대화가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동네 산책을 하고 돌아온 아빠의 깜짝 이벤트에 잔잔했던 나의 감정은 밀물과 썰물이 휘몰아쳤다. 현관에 들어선 아빠는 꽃다발같이 부푼 솜사탕을 내게 건넸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솜사탕을 들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였다. 내가 조금만 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면 코끝이 시큰거렸을지도 모른다. 사회인으로서 제 몫을 해내야 할 나이에 홀로 멈춰있는 나의 미성숙함이 여전히 부모님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 같아 죄송했고, 이 나이에도 여전히 꿈 많고 욕심 많아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는 나를 지지하는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이 참으로 감사했다.


다 큰 딸에게 사랑을 듬뿍 담아 솜사탕을 안겨주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나의 인생을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단단해졌다. 무엇을 하든 나의 편이 되어주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이 우주를 홀로 맴도는 것 같은 붕 뜬 기분을 내게서 몰아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께름칙한 기운이 사라지니 시야도 판단력도 선명해졌다. 나는 나의 길을 만들어갈 용기가 생겼다. 두 발을 땅에 딛든 허공에서 허우적대든 나는 내 방식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나의 정상 궤도를 찾아 항해할 미래에는 부모님이 걱정 없이 믿고 기대도 되는 든든한 딸이 되었으면 한다. 그 미래가 머지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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