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5를 기대하며 둘러봤지만 빅5를 다 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사자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때에도 스프링복만 열한 번 정도는 본 것 같다. 스프링복은 도처에 널렸고 항상 싸우고 있었다. 내 개인적인 미션처럼 느꼈던 빅5 중 하나는 물소(버팔로)였다. 아프리카로 휴가를 간다고 했더니 회사에서 망원 렌즈를 빌려주셨다. 이때 물품 관리 담당 차장님이 '물소 눈동자'를 찍어 오라고 장난처럼 말씀하셨는데, 나는 꼭 그 보답을 하고 싶었다. 여행에 이렇게 값비싼 망원 렌즈를 들고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물소 눈동자는커녕 물소도 보지 못했다. 물소로 착각한 와일드비스트만 줌을 당겨 찍었을 뿐이다.
에토샤 국립공원을 돌면서 유독 반가웠던 동물들은 기린, 얼룩말, 코끼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된 익숙한 동물들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익숙함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기린은 나무 위에 풀 뜯어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탤런트 엄현경이 TV에 나와 기린 인형을 모으는 모습이 공개가 됐었는데 나도 그걸 본 이후로 왠지 기린이 좋아졌다. 얼룩말은 사진으로 남겼을 때가 압권이었다. 내가 오지 포토그래퍼인 양 찍기만 하면 작품이 탄생했다. 코끼리는 보고 나니 그 어원이 궁금해졌다. '코끼리는 왜 코끼리지? 코가 긴 애들끼리, 끼리끼리 몰려다녀서 코끼리인가?'
그래서 한국에 와서 실제 코끼리 어원을 검색해봤다. (*'코와 코끼리'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코'는 말 그대로 코를 의미하고 '끼리'는 '길다'의 '길-'이 된소리로 발음돼 '낄-'이 되고 여기에 명사화를 시키는 '-이'가 붙어 생긴 말이다. '코-낄-이'가 발음될 때 '코끼리'가 된 것이다. 끼리끼리 몰려다녀서가 아니라 '코가 긴 동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나는 끼리끼리 몰려다녀서 코끼리라고 허풍을 떨고 다녔다.
여행하면서 나는 몇 꺼풀 더 벗겨져 유치한 사람이 되고 실없는 말도 자주 했다. 나이테를 몇 겹 껴입고 만났지만 여행이 진행될수록 동행들에게 나의 소녀 시절부터 20대 아가씨의 모습까지 다 보여주게 되었다. 그만큼 동행들이 편했고, 그들이 나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줘서 그런 것 같다.
아쉽게도 빅5 중 코끼리만 보고 이제 떠날 참이었다. 에토샤 국립공원을 이렇게 스치듯이 여행하다니, 여길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사자'도 못 보고 가다니 너무 아쉬웠다. 휴가를 내고 왔으니 일정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박 11일의 휴가가 짧다고 느껴진 건 아니었다. 바쁘게 이동하긴 했더라도 하루를 길게 써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꼈다. 그래서 마음을 정리했다.
'모든 것을 샅샅이 보면 그건 일상이다. 일부의 계절과 복불복 날씨에, 한정된 공간을 훔쳐보고 오는 짧은 시간이 여행 아닌가!
아쉬움도 몇 개 챙겨 오는 게 여행, 맞다. 휴가로 아프리카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욕심을 덜어내자.'
룬두로 떠나기 전에 예지한테 큰손(렌터카 주인)한테 렌터카 반납 장소를 문의해보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나도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당일은 룬두로 떠나는 날이 아니었다. 렌터카 반납은 그 당시 '오늘'이 아니라 '내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루 더 일찍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에겐 하루의 여유분이 있었다. 도대체 어느 도시에서 일정을 줄였던 것일까? 서로에게 의지했을 텐데 왜 아무도 이 일정을 몰랐을까? 한국과의 시차 때문에 스케줄을 착각했나? 이제껏 우리가 마주한 돌발상황은 늘 외부에서 오는 것이었지만 처음으로 우리 내부에서도 돌발상황을 만들어냈다.
룬두로 떠나기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마터면 관광지도 아닌 룬두에서 하루를 더 소비할 뻔했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구경하던 우리는 갑자기 템포를 늦추어 이동했다. 그리고 룬두와 가까운 캠핑 사이트에서 하루 더 묵어가기로 결정했다.
뭔가 회사에서 '그래, 휴가로 아프리카를 다 둘러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하며 휴가 하루를 더 연장해 준 것 같았다. 겨울 잠바 주머니에서 공돈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우리의 우둔함으로 하루를 벌었다. 나이스!
[돌발상황 #15] 유일하게 우리가 만든 돌발상황! 계획된 일정보다 하루 일찍 이동하고 있었다. 이것을 룬두로 이동하기 전에 알게 되었다. 에토샤 국립공원에서 하루 더 묵고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