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여행 이야기 서른일곱 @잠비아 리빙스턴-한국
숙소로 돌아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잠비아를 떠날 채비를 했다. 예지와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회사로, 하국 오빠와 지석이는 탄자니아 잔지바르로 떠나 한 달간 아프리카 여행을 이어갈 시간이다. 네 명이서 함께 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숙소를 떠나기 전 남은 공금으로 아프리카 지도를 하나씩 샀다.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여행이 끝나면 집에 다들 붙여두기로 했다.
하국 오빠와 지석이는 잔지바르로 떠나는 비행기가 오후 늦게 있었지만 예지와 나의 비행시간에 맞춰 점심 즈음 잠비아 리빙스턴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때도 같은 택시 기사가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그녀와도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에 들어갔다. 일부러 일찍 왔는데 공항은 너무나 한산했다. 인적도, 활기도 없는 공항을 보자니 여행이 정말 끝난 것 같았다.
이 완벽한 여행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시간을 다 쓴 것이었다. 우리는 의자에 아쉽게 걸터앉아 마지막으로 네 명이서 사진을 찍었다. 예지랑 나는 끝까지 남자들이 번지점프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막상 헤어질 때 네 명이 같이 인사하니 좋기도 했다. 번지점프만큼 흥분된 감정은 아니었지만 고마움이 그 감정을 모두 채우고도 남았다. 예지랑 나는 계속될 이들의 여행에서 들고 다닐 필요 없는 물건들을 모두 우리 가방에 옮겼다.
"한국 가서 또 봐요. 남은 여행도 잘하고! 안녕, 빠이빠이"
출국 시간이 다가오자 공항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지랑 나는 출국 수속을 밟았고 남자 동행들과 반대편에 서서 꼬리가 긴 인사를 했다. 네 명이서 다니다가 두 명이 빠지면 더 여행하는 두 명이 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렇게 날 떨리게 한 아프리카 여행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미비아 첫날에 잠비아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한국 가는 비행기를 제때 타긴 타는구나'
출국장 게이트로 들어가니 기념품 면세점들이 나왔다. 방금 헤어지느라 아쉬웠던 마음은 뒤로, 구경하느라 바로 신났다. 이런 걸 국면전환이라고 하는 걸까. 나는 내 업무를 대신 해준 회사 분들을 생각하며 작은 기념품을 구매했다.
시간이 지나 비행기를 타러 갔다. 예지가 우리 한국 가는 거 사진을 찍자고 했다. '대단하다. 나보다 많이 찍는 사람은 진짜 진짜 네가 처음이야!' 친구가 한국 가는 날까지 흥 수치가 떨어지지 않고 좋은 기운을 주니 또 이 친구랑 한국으로 여행 가는 것 같았다.
여행하면서 둘이서만 있어본 게 많지 않았는데 둘만 있으니 비행기 안에서 정말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제일 인상 깊었던 거는 승무원인 이 친구가 이번에 "진짜 여행을 한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다.
예지는 그동안 일로든 개인적으로든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 여행이 예전만 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고 했다. 여행을 좋아해서 하고는 있지만 어딜 가도 비슷하니 감흥이라기보다는 의례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어딜 더 가봐야 하지?'하고 당황했는데 이번에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와서, 너무 다른 여행을 해서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났다고 했다. 이제까지 하던 여행은 관광이었던 것 같고 아프리카 여행은 '진짜 여행'을 한 것 같다는 감상을 전했다.
나도 동의했다. 유럽여행이 마냥 좋기만 했으면서도 이제 도시 여행을 가서 유명한 건물 앞에서 사진 찍고 그러는 게 조금 싱거워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런 여행이 주는 낭만이 있지만 이렇게 대자연에서, 우주적인 느낌을 받는 여행은 차원이 다른 여행 같았다.
예지가 말을 이어갔다.
"근데 우리 유럽 가면 아마 또 잘 놀 거야."
"그건 그래. 테라스에서 커피만 마셔도 너무 좋지 않냐. 가게 들어가서 기념품 다 신기하게 보고 올 게 뻔하다."
'좋다'라는 게 말로는 같지만 어떤 게 좋은지, 그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카메라 이야기도 했다.
"나 이번에 액션캠 사서 여행 왔잖아. 항상 어디 딱 도착해서 촬영한 적은 많은데 이렇게 여정을 다 담은 여행은 처음이야. 너랑 와서 많이 찍었어!"
"예능 프로 만드는 것처럼 나는 과정을 다 찍는 게 좋아. 영상이 진짜 생생하잖아. 이번에 찍은 거 5년 뒤에 봐도 우리 여기 또 온 느낌일 걸?"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같은 여행지를 두 번 오는 건 쉽지 않다. 다음 여행지를 선택할 때 가본 곳은 가보지 못한 곳에 밀릴 테고 시간이든 돈이든 언제나 여유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또 좋아서 온 거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야 떠날 힘이 있는데 그 에너지가 항상 충만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여행지의 온순간을 남기는 게 나는 언제나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지를 눈에, 가슴에 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사진이 여행의 반이다. 나에게 여행이란 다녀와서 좋았던 순간을 계속 그리워하는 것에 더 가깝다. 순간의 기억은 유한하고 카메라로 남긴 추억은 내 온 기분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때의 나를 질투 나게 한다.
여행을 많이 하던 친구가 이번 여행에서 '진짜 여행'을 했고 여정을 많이 촬영한 것도 처음인데 이 모든 순간을 나와 함께해서, 나도 정말 행복했다. 그밖에 여행하기 전에 가져온 고민들, 20대 후반에 겪는 직장 생활, 인간관계, 서른을 어떻게 맞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예지는 나와 중∙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을 세 번이나 지냈지만 대학교에 가면서는 드문드문 만났었다. 직장생활 하면서 여행으로 얘기가 통해 이렇게 휴가를 같이 오고, 이를 계기로 대화도 많이 나누게 되었다.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숙식을 같이하며 오래 붙어 있으니 원래 친했던 친구랑 더 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른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친했던 친구랑 '과거에 친했지'로 되고 만남이 드물어지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과거는 알지만 현재는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아주 자세히는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서른을 앞두고 이 육춘기(?) 같은 시절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니 이 친구랑은 앞으로 더 편하게,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없는 "사막에 가보자!"로 시작했던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짓게 되었다. 우리는 요하네스버그-홍콩을 환승해 오후 늦게 인천에 떨어졌고, 나는 저녁 10시가 돼서야 집에 도착했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다 자려고 방에 누웠다.
'와, 너무 큰 걸 보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