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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01. 2022

Prologue. 서른여섯, 박가영.

이것은 아빠와 딸의 이야기다.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프롤로그



 박가영은 1987년,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박 씨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박가영의 부모님은 그녀가 8살이 되었을 때 이혼했고, 그 직후 집이 파산했다. 가영은 아버지에 의해 고모 집에 맡겨져서 컸다.


 이후, 박가영이 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은 그녀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박가영의 아버지는 약 10여 년의 실패와 삽질, 도전 끝에 어찌저찌 식당을 차렸고, 다행히 그것이 그럭저럭 잘 됐다.


 그렇지만 14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한 가영이 아버지와 다시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일은 없었다. 어느덧 20대가 된 그녀는 서울에서 한창 자취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한창 장사를 하느라 바빴으니까.  


 오랜만에 재회한 부녀는 그저 각자 알아서 잘 살며 가끔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만족했다. 여태까지 그랬듯이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박가영은 한 온라인 서점의 MD로 취업했다. 

 그녀의 담당 분야는 문학, 그 중에서도 국내 소설이었다. 이후 11년을 같은 직장에서 근속했고, 그러면서 28세에 소개팅으로 인생의 뒤늦은 첫 연애를 시작했다.


 친척 집에 얹혀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삶은 전반적으로 평탄했다. 

동네 헬스장에 있는 트레드밀에 오른 것처럼 묵묵히 단조롭게 걷다 보니 35세의 나이에 그녀는 꽉 채운 6년 차 대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걸어 오는 동안 그녀의 앞에는 어떤 변화도 장애물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부지런히 걸었을 뿐이다. 쳇바퀴처럼 부지런히 돌아가는 트레드밀처럼,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하며 돌아오는 그 길을 말이다. 그리고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위를 걷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서른 다섯이던 어느 가을날. 가영은 회사에 무작정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왔다. 


 그러면서 결혼 이야기가 오간(지만 3년째 긴 했지만)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이후 해가 바뀌어 박가영은 올해 서른여섯이 되었고, 현직 백수이다.


 그녀는 현재 아버지의 집에 얹혀살며, 방구석에서 웹소설을 쓰면서 살고 있다.


 이제 그녀는 동네 헬스장의 트레드밀이 아닌, 날벌레와 미세먼지가 가득한 산책로를 걷는다. 생각만큼 낭만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여긴 잔잔한 바람도 불고 가끔은 꽃도 핀다. 그래서 가끔은 꽃가루도 날리지만, 뭐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30대 중반의 어느 날 인생에 느닷없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해 버린 한 백수 캥거루의 생존기이다.






00. 서른여섯, 박가영



 박가영은 1987년,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박 씨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가영의 아버지 박병호는 당시 그 도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부자였다. 당시 그 도시에 살던 거의 모든 사람이 박병호라는 이름 석자를 알았다. 그는 비록 가방끈은 짧았지만, 대장부 기질이 있어 대인 관계가 좋았으며 사업에도 꽤 소질이 있었다. 


 막 서울에 상경했던 20대 초반에는 꽤나 고생을 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그런 고생과 실패를 경험해서인지 그의 나이 스물 여섯에 믿을 만한 고향 친구 몇 명을 모아 함께 시작한 사업이 드디어 꽤 잘 풀리게 된다.  


그의 외동딸 박가영이 태어난 해, 1987년. 병호의 나이가 28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어느덧 사업이 상당히 번창해 있었다.  


사업도 잘 되겠다, 사랑스러운 딸도 태어났겠다.

한동안 큰 기복 없이 승승장구해왔던 그의 당시의 삶에는 그야말로 부족한 게 없었다. 


 그는 당시에 아무나 몰지 못하는 최신형의 각 그랜져를 몰았고, 옷이든 구두든 시계든 몸에 걸치는 건 명품이 아니면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번 꿈꿔보고 싶은 멋진 인생이었다.

 

 다만,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그다지 운이 좋지 못했다. 그보다 6살이 어린 그의 아내는 그를 증오했다. 그녀가 그와 결혼한 이유는 오직 딸을 임신했다는 그 사실 때문이었다. 

 

 결혼 전 두 사람의 관계는 병호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했지만, 병호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고리타분한 속담을 신봉하는 남자였다. 그렇게 찍고 찍어서 결혼까지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탄히 굴러가지 않았다. 


 혼전 임신으로 호다닥 결혼식을 치러버린 이후. 병호의 아내는  자꾸만 불러오는 자신의 배를 보며 늘 자신의 인생의 가능성을 이제 완전히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혼전 임신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고, 그녀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다니던 대학도 그만둬야 했다.  그녀는 깊이 절망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자신의 절망을 숨기기엔 너무 어리고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병호를 원망하고, 뱃속의 아이를 원망했다. 끔찍한 임신 기간이 지나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도 그녀의 절망은 끝나지 않았다. 

 

 병호는 그녀가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게 지나가면 차차 마음을 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과는 달리 이후로도 자신의 인생을 망친 병호와 아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무려 8년 동안을 말이다.  


 누군가가 병호에게 나중에 그의 인생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8년을 과연 ‘결혼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병호는 어쩐지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시간들은 적어도 그가  꿈꿨던 모습은 아니었으므로.


 대체로 상처뿐인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병호에게 남긴 것은 있었다. 바로 그의 유일한 딸인 박가영이었다.


 이상했다. 생긴 것도, 하는 짓도 한순간도 얼굴조차 맞대기 싫은 아내와 꼭 닮았음에도 딸은 아내와는 또 다른 존재였다. 병호는 가영 앞에서는 항상 그저 꺼뻑 죽는 팔불출 아버지였다.


 박병호는 박가영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때로는 그 사랑이 너무도 눈에 띌 정도였다. 그리고 어쩌면 딸에 대한 그의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큰 역할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언제 끝나더라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롭게 지속되었다. 그 완전한 끝은 박 씨 일가의 몰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다. 


 가영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이었다. 집 앞에 낯선 남자들이 찾아오고,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밤에서 깬 가영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방에서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문을 쾅 닫고 집에서 나갔고, 집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숨을 죽이고 있던 가영의 귓가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영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밖을 내다 보았다. 


 가영이 본 것은 바퀴 달린 큰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영이 이후의 인생을 통틀어서 봤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원래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던가. 병호는 사업 스트레스와 아내와의 트러블로 인한 스트레스로 도박에 빠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맞춰 도박 빚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불어났다. (인생이란 때로는 이처럼 전형적이다. 마치 아침 드라마처럼.)


 이제 병호는 폼나게 끌고 다니던 각 그랜져도 저당 잡히고, 이 신도시가 생길 때 가장 먼저 손 끝으로 집어서 빚 없이 구입했던 아파트에서도 맨몸으로 쫓겨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급한 대로 중요한 짐은 모두 빼서 이삿짐센터에 보관을 맡겼지만, 당장 내일도 등교해야 하는 어린 딸을 데리고 도망갈 순 없었다.


 결국 병호는 딸의 손을 잡고 근처에 살던 누나의 집을 찾아간다. 누나도 사정이 어렵고, 누나에게도 먹여 살려야 할 아이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가영을 누나에게 맡긴 그날 밤부터, 병호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딸과는 오래도록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 헤어질 당시 가영의 나이 8세, 병호의 나이 36세였다.





***




 가영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야무진 아이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매일같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도 꽤 익숙했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여기에 두고 간 건지, 우리 집이 어떻게 된 건지 미친듯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남다른 상황이 선물해 준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 있었다. 바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해서 어른들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가영은 어떻게든 스스로 답을 찾으려 애썼다.


나를 미워하던 어머니는 나를 두고 어딘가로 떠났다.

나를 사랑하던 아버지는 이제 볼 수 없다.


 가영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고, 자신을 돌봐주는 고모와 가족들,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눈치채기 힘들도록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 이후부터 그녀의 행동은 이제 ‘남들처럼’ ‘평범하게’ ‘튀지 않게’ 살아가는 데 온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는 삶이나, 고모 집에 얹혀 사는 상황은 어차피 어린 아이인 그녀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가영은 일찌감치 체념하고 의연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혼자서도 평범해지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가장 쉬운 것은 공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영은 학교에 가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거기까지는 부모님이 쫓아오지 않으니까. 그곳에서는 부모가 늘 장식처럼 따라다니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가영이 학교에서 할 일은 그저 남들과 같은 학생 신분으로서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친구들이랑 잘 어울려 놀고, 숙제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누구나 학과 과정 안에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본다. 그리고 기왕 시험 보는 것, 그 성적을 잘 받으면 ‘바람직’한 학생이 된다. 


 가영에게는 시험을 잘 보라고 잔소리하는 부모가 없었지만, 그래서 가영은 반대로 더 열심히 공부했다. 마치 집에 자식 성적에 목숨을 건 학구열 넘치는 부모가 있어 가영을 매일같이 들들 볶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영에게 있어 성적을 잘 받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험을 볼 때마다 전교 등수 한자리 수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나고 특출 나게 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반에서 상위권이라고는 할 수 있는 정도의 적당한 성적은 유지했다. 그렇게 가영은 전반적으로 착실한 모범생의 길을 걸었다.


 박가영의 초중고 동창 중 누구든 붙잡고, ‘박가영이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면 공통적으로 나올 대답은 아마도 그냥 안경 끼고, 공부 잘했던 애. 지극히 평범했던. 일 것이었다. 


 극도의 평범함과 안정성 추구.


그것이 바로 박가영의 오래된 생존 전략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체득했던 그 습관은 이제 박가영이라는 사람의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가 되어 버렸다. 


 학창 시절에는 솔직히 식은죽 먹기였다. 이렇게 평범한 척 같은 반 친구들을 속이는 것은 정말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앞으로도 본인이 평범함과 안정성만 추구하면서 적당히 살면 인생이 이렇게 쉽게 술술 흘러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그녀에게 주어졌던 ‘공부’와 ‘성적’이라는 과업을 해결해 왔듯이, 앞으로도 이렇게 인생에서 줄줄이 주어지는 과업들을 하나씩 평범하게 클리어해 나가면 된다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남들과 같은 ‘오리지널’의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가영이 어린 시절 헤어졌던 병호를 다시 안정적인 주기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사실 그 사이에도 1년에 한두 번씩 마치 연례행사처럼 병호를 만나서 같이 밥을 먹긴 했었지만, 그녀가 아버지와 헤어질 때마다 '다음에는 또 언제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약속을 잡아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은 대략 그 쯤부터였다.


 병호는 떠돌이 생활 중 이곳저곳을 떠돌며 일용직으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고급 양복을 걸치고 각 그랜져를 타던 그에게 막노동은 무척이나 고달팠다. 하루 일하면 하루는 꼼짝도 못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다음날은 쫄쫄 굶고. 전전하던 모텔 방값이 아까워 날씨가 따뜻한 봄, 여름에는 불가피하게 노숙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어쩌다 흘러온 경기도 구석에 있는, 동네 주민들만 드문드문 다니는 한 지하철 역 앞. 불가피하게 노숙을 하려고 바닥에 주섬주섬 신문지를 깔던 병호에게 누가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이다.


“형님?”


 병호는 처음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남자를 보며 눈만 꿈뻑꿈뻑 떴을 뿐이다. 남자의 얼굴을 한순간에 알아보긴 힘들었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 


‘가만, 어디서 많이 본 것도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병호가 눈만 꿈뻑거리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병호 형님 맞으시죠? 접니다. 근수요!”

“근수..?”


 잠시 그의 이름을 곱씹고 나서야 병호는 그를 기억해냈다.


“아, 근수 너! 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병호는 순간 자신의 꾀죄죄한 몰골도 잊은 채 반가움에 30년 만에 만난 고향 후배를 얼싸안았다. 근수는 예전에 고향에 있을 때, 종종 같이 어울렸던 고등학교 후배였다. 예전부터 병호를 잘 따라서 그도 꽤 예뻐했다. 


비록 자신의 몰골이 초라하긴 했으나, 이런 상황이라도 과거의 잘 나갔던 병호를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나니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형님, 근데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근수의 물음에 병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늘 호랑이처럼 당당했던 병호의 초라한 모습에 근수는 속으로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그것보다 형님,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안 하셨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어요.”


 당시 박병호의 나이 44세. 길바닥을 떠돌며 무려 8년을 고생한 끝에, 병호의 인생에 이렇게 기적처럼 귀인이 나타난다.


 병호가 따라간 곳은 역 근처에 있는 근수의 식당이었다. 


 근수는 경기도 외곽의 한 신도시에서 꽤 장사가 잘 되는 프랜차이즈 고깃집을 두세 개 운영하고 있었다. 한창 때의 병호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공한 사업가로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날, 병호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된 근수는 병호가 자신의 식당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주고, 가게 근처에 숙소도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병호는 근수의 식당에서 온갖 잡일을 도맡게 되었다. 주방보조에 요리까지. 난생처음 해보는 식당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땀흘려 돈도 벌면서 병호는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많이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묵묵히 일하면서, 병호는 자신 또한 식당을 차려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다. 단, 프랜차이즈가 아닌 본인의 오리지널 레시피로 말이다. 


 2년 간 근수의 식당에서 일하며 조금씩 돈을 모은 병호는 근수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자금을 구해, 근수의 가게 근처에 급매로 싸게 나온 식당 자리를 하나 빌렸다. 그리고는 근수의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이 틈틈이 개발한 오리지널 레시피로 석쇠 불고기 전문점, <박가네 불고기>를 차렸다.


 역 뒤편, 유동 인구가 적은 입지에 마련된 그 식당은 눈에 잘 띄지 않아 처음에는 망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병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을 위한 반값 쿠폰을 만들어 주변 거주 시설들을 맨 윗층부터 아랫층까지 직접 돌아다니며 뿌리고 다닌 것이다. 


그  절박함이 통한 것인지, 행사 기간에 싼맛에 한번 방문해봤던 지역 로컬들이 생각보다 괜찮은 맛에 꾸준히 재방문을 하게 되었다. 이후 입소문이 나며 자리를 잡고 그럭저럭 1~2년 정도는 장사가 그냥저냥 괜찮게 굴러갔다. 


 이후 박병호의 <박가네 불고기>의 매출은 한 번의 천운을 만나 급격하게 오르게 되었다. 


 최근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모 연예인이 방송에서 본인이 실제로 다니는 단골 식당으로 병호의 식당을 소개한 것이다. 


정작 병호는 그 연예인이 누군지도 잘 몰랐지만, 주말 황금시간대에 한번 방송을 타게 되자 식당은 바로 그다음 주부터 대기 번호 시스템을 도입해야 할 정도로 대박이 나 버렸다.


 이후 몇 달이 지나자 방송의 효과가 빠지면서 손님이 다시 빠지 정신없던 시기는 끝났지만, 다행히 그 거품이 빠진 이후에도 손님이 어느 정도는 유지되는 식당이 되었다.


 그렇게 병호가 가족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사업을 시작하여 식당 사장으로서 재기에 성공하고, 밀린 빚을 어느 정도 갚은 채로 가영 앞에 다시 나타난 시점은 두 사람이 헤어진 지 어느덧 14년이 흘렀을 때였다.


 사실, 그 때의 병호에게는 분명히 당장 어떻게든 집을 구해 딸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둘이 헤어졌을 당시 가영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가영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을 인생의 성장기를 함께 보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병호를 항상 괴롭히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가족이었지만, 이제 각자의 인생에서 함께 살았던 시간보다 떨어져 산 시간이 더 길었다. 병호는 이 간극을 늦게라도 천천히 메워가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가영에게 이렇게 물어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상황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으니까 어때? 같이 살래?”


 병호의 물음에 가영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사실, 두 사람이 재회했을 무렵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가영은 서울에 있는 대학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시작한 지 2년 째였고, 가영에게 병호는 비록 아버지이긴 했으나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밖에서 밥을 먹을 수는 있어도 ‘가족이니까 함께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존재였다.


 당시 가영에게 병호는 가족이라기보다는 마치 일종의 후원자나 키다리 아저씨에 더 가깝게 느겨지는 존재였다. 사실, 가영은 제 10대의 성장기를 통째로 보냈던 고모의 집에서 사는 것도 어쩐지 불편해서 대학생이 되자마자 서울로 나와버렸기 때문에.


“나 그냥 자취할래. 지금 집이 학교도 가깝고.”


그래서 가영은 이렇게 단번에 거절했고, 병호는 그런 딸래미가 조금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다 박병호의 업보인데.


 그래도 이때 가영이 병호의 ‘같이 살자’는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 나름대로 병호의 말 자체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좀 그렇지만 나중에는 … 언젠가 나중에는 아빠와 같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당시로서는 대학 근처에서 혼자 사는 삶이 너무 편했고…그래서 뭔가 잘 상상이 되지 않을 뿐이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지극히 막연한 답이었다. 


‘그래도 살다 보면 언젠가 한번은 같이 살아보는 날도 오겠지.’


 단지 그것이, 본인이 30대 중반의 백수가 되어서 팔자에 없는 캥거루 족이 되어 병호의 집구석에 들어앉는 형태로 구현되리라는 것은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뿐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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