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우연이 없다면,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다'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 (4)

by 김덕영

'여행에서 우연이 없다면,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다'

평생 동안 보들레르는 항구, 부두, , 기차, , 호텔방에 강하게 끌렸다. 자신의 집보다 여행을 하다 잠시 머무는 곳에서 더 편안함을 느꼈다. 파리의 대기가 그를 짓누를 때면, 세상이 단조롭고 작아 보일 때면, 그는 떠났다. '떠나기 위해 떠났다'. 항구나 역으로 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다오." - T. S. 엘리엇


여행, 책, 공항. 이 세 가지의 삼각형 꼭짓점을 연결하다 보면 늘 머물게 되는 점, 한 곳이 있다. 뜻밖에도 나에게 그곳은 남미의 오랜 유산이 숨겨져 있는 곳, 바로 멕시코시티(Mexico City)다. 그리고 그곳은 나에게 멕시코가 낳은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녀의 그림과 만나는 것, 그녀의 인생과 만나는 것은 강렬했다. 비록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멕시코를 여행하려면 비행기를 한두 번은 갈아타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저렴한 비행기표를 얻기 위해서 서울에서 도쿄, 도쿄에서 LA, 다시 LA에서 멕시코시티로 세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탔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한 시간까지 합쳐보니 이동한 시간은 모두 스물세 시간이나 되었다. 서울에서 멕시코시티로 이동하기 위해서 거의 하루가 걸린 셈이다.


자연히 기다리는 시간도 많고 해서 공항에서 책 한 권을 샀다. 그 책은 내 마음속에 이국적인 남미의 열정과 숨겨져 왔던 전설 같은 이야기들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프리다 칼로(Frida Kahlo)였다.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독특한 인생관을 지녔던 여자. 멕시코시티로 비행하는 시간 내내 그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만나고 사랑했던 역사 속의 인물들까지 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처럼 다가왔다.


여성의 굴레를 상징하는 처참한 이미지들이 남미의 정열적인 과일들처럼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되었던 그녀의 그림들. 무척이나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 그림만으로 접한 프라다 칼로는 남성인 나에게 그리 매력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 속에는 뭔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어떤 강렬하고 순순한 감정이 존재했다. 내가 그녀의 그림에 대해 가졌던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은 대충 그런 것들이었다. 처절함과 숭고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이미지라고나 할까.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전히 멕시코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


그런 내가 그 책을 읽어가면서 뜻밖에도 점점 그녀가 살았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림이 아니라 책을 통해 프리다 칼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멕시코 혁명, 제3세계,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와의 애증에 얽힌 삼각관계 그리고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까지, 그녀의 삶에는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소재들이 가득했다. 자유롭고 싶었던 한 예술가의 삶을 시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내려버려두지 않았다.


한평생을 여성과 혁명 그리고 자신과의 치열한 한 판 싸움 속에서 쉼 없이 달려왔던 그녀였지만, 숨을 거두던 마지막 순간에 "나는 두 번 다시 이 지구라는 별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라고 외치며 삶을 마감했던 여자...


'두 번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입에서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그녀가 말하는 이 '지구라는 별'은 뭘까? 그녀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단호한 말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 했을까? 혹시 정말 그녀는 이 지구라는 별을 떠나 지금은 다른 별들 사이를 여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순간에 수많은 물음표들이 내 발 밑에 떨어졌다. 다이어리에 그녀의 이름을 메모하며 자연스럽게 예정에도 없었던 프리다 칼로의 생가, 아틀리에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따르던 수많은 멕시코의 지식인과 예술가들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던 멕시코의 민중들에게 이 말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이런저런 호기심과 상상에 빠져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스피커를 통해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곧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 주세요."


멕시코시티에서 허락된 시간은 일주일. 늘 하던 대로 그 일주일이란 정해진 취재일정 중에서 마지막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쓰기 위해서 나는 6일 동안 남들의 두 배 이상 부지런히 취재를 하러 뛰어다녔다. 그만큼 그 책을 통해 생겨난 프리다 칼로에 관한 궁금증은 나의 멕시코시티 일주일 여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침내 정해진 일정들을 다 소화해 냈다. 이제 내일은 그토록 기다리던 나를 위한 시간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리다 칼로의 아틀리에를 찾기 위해서 나는 하루 전날부터 부지런히 자료를 찾고 지도를 구해다가 표시를 해나갔다. 지도에 표시된 지명은 Londres 235번가, Del Carmen, Metro Coyoacán 구역, 코요아칸이라는 이름을 보자 오래된 아즈텍 문명의 흔적이 순간 느껴졌다. 처음 가보는 길, 오직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존재한다.


우선은 지도 위에 빨간 볼펜으로 동선을 표시했다. 어디서 어떻게 이동을 할 것인가? 낯선 장소에서는 동서남북이 어딘지도 분간이 안 갈 때가 있다. 그래도 지도를 들고 있으면 왠지 불안한 마음이 가신다. 마치 남미 아마존으로 목숨 건 선교사가 성경을 손에 쥐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영화 '미션'의 한 장면이 오버랩됐다.


그 지도 위의 긋고 있는 빨간 볼펜 자국들의 끝에 프리다 칼로의 생활 범위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가보지도 않은 이곳저곳의 가게나 음식점들 그리고 그녀가 걸었던 거리들이 떠올랐다. 목적지는 그녀의 아틀리에지만, 어차피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그녀가 다녔던 길과 상점들을 스쳐 지나칠 것이다. 비록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도 오래 머문 자리에는 작은 영혼의 흔적이라도 묻어 있지는 않을까. 그것이 내가 프리다 칼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던 순간의 기억이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드디어 예상에도 없던 여행 속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우연에 기대는 설렘, 그렇게 우연에 몸을 맡기자 묘한 흥분도 밀려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곳에 도착해서 공항에서부터 현지 안내와 취재에 도움을 주었던 현지 한국 기업의 주재원들이 늦은 밤에 나를 호출한 것이다. 이유는 당연히 그들의 계획에는 없었던 나의 돌출적인 개인행동에 있었다.


"멕시코에서 혼자서 여행을 하시겠다고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요!"


적어도 그들에게는 내가 얌전하게 사고 없이 멕시코를 떠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것이 취재 기간 내내 나를 에스코트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신들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프리다 칼로의 아틀리에를 찾겠다니 황당한 일일 수밖에. 혹시라도 취재진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고스란히 자신들의 떠맡아야 할 책임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다음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나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부둥켜안다시피 하며 '제발 가지 말아 달라'를 호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이 프리다 칼로의 아틀리에를 혼자서 찾아가겠다는 생각을 취소해 달라며 들이댄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다 논리적이고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물론 그때 그들이 했던 말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아주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될 만큼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니까.


"피디님 그거 모르시죠? 멕시코에서는 말이죠. 택시 강도가 많아요. 그런데 택시 강도가 뭔지 아십니까? 여기서는 택시 강도가요, 우리처럼 택시 기사를 칼로 위협하고 돈을 뜯어가는 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택시 강도가 택시 기사에요. 택시 기사가 손님을 태운 뒤에 어디 으슥한 곳에 데리고 가서 칼이나 총으로 위협해서 돈을 뜯는 걸 말해요. 택시 드라이버가 강도란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아무튼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죠?"


대략난감이고 어이상실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택시 기사가 강도라는 말에 솔직히 겁도 좀 났다. 그렇다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점찍어두었던 프리다 칼로의 아틀리에를 포기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결코 그럴 순 없는 일이다. 문제는 호텔 로비에서부터 나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달렸다. 과연 나는 단 하루 남은 멕시코시티의 여행에서 안전하게 프리다 칼로의 아틀리에까지 갈 수 있을까? 순간 머릿속에서 모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 현재 아이슬란드 정착 생활을 준비하며 쓰고 있는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라'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글은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쓰일 것입니다. 일상에 매몰된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을 읽고 공감하신다면 널리 공유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쓴 책들은 현재 시내 유명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구매해주시는 책들은 다큐멘터리 제작과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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