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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지

어느 대학원생의 마음가짐

by 통역하는 캡틴J

처음 플라잉 요가를 접했던 때를 기억해 본다.


늘 하타나 빈야사 수업만 듣다가 갑자기 눈길을 돌려 멋져 보이는 플라잉 요가 수업에 들어갔다.


나의 첫 플라잉 요가 수업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거꾸로 매달리고 돌리고 떨어지고… 결국 어느 한 동작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고 박탈감만 느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도전했다가 체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고 나의 승부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플라잉 요가는 일단 초급부터 참여해 보기로 했다. 초급반 수업은 힘들긴 했지만, 시도하면 얼추 따라 할 수 있는 동작들로 구성된 수업이었고 동작을 하나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뿌듯함을 느끼며 그렇게 플라잉 요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새 능숙하게 초급반 동작을 완성시키며 우쭐했던 나의 기분도 잠시였다. 늘 그렇듯 배움이란 항상 순탄치 않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일정 차질로 다른 선생님의 초급반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다수의 동작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또다시 좌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잠깐이었지만 나의 자만심을 반성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나도 모르게 통역 공부와 플라잉 요가를 비교하고 있었다.


통역 연습에도 늘 굴곡이 있다. 어느 날에는 잘하는 듯하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망치기도 한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쯤 또다시 정복할 대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통역이든 운동이든 나를 계속 노력의 길로 인도했던 것은 좌절과 실패였다는 것이다. 통역을 잘했던 날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통역을 못했던 날에 끊임없이 좌절하고 나서 내가 실패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었다. 무언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공부와 훈련의 첫걸음인 듯하다.

내가 늘 무지의 지(知)를 가슴에 새기는 이유이다. 무지의 지는 내가 어떤 걸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타인지와도 연결되어 있는 이 개념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내가 알기론, " "~것으로 알고 있다"와 같이 무언가를 안다라는 말은 자주 들어봤어도, 무엇을 모른다라는 말은 잘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무슨 말장난 같은 이 말은 생각보다 꽤나 진지하고 그 역사가 깊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앎으로서 남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다고 주장한 소크라테스는, 다수결에 의거한 민주주의 맹점에 따라 결국 사형을 당했지만 그를 따르던 플라톤을 비롯해 수많은 젊은 제자들을 통해 그 명맥을 기록으로나마 이어가게 되었으나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Modern science is based on the Latin injunction ignoramus—‘we do not know’,” 즉, "현대 과학은 무지라는 라틴어에서 기원한다"라고 주장한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인간의 호기심에서 학문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호기심은 인간이 그 어느 동물보다 똑똑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전에 싱글즈 잡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런던 타임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1. 모래성을 막 완성한 어린아이

2. 아기를 목욕시키고 난 어머니

3. 세밀한 공예품을 만들고 나서 휘파람을 부는 목공

4. 어려운 수술에 성공해 생명을 구한 의사


행복은 '순간'이며 해야 할 일을 마친 때, 내가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뒤 이어 무덤덤한 일상이 찾아온다. 지루한 일상을 불행하게 여기면서 행복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히면 곤란하다. 권태를 잘 즐기는 인생이 최고다.


통번역대학원 다닐 때 매일 스터디를 하면서 통역 연습을 하는 게 죽을 만큼 괴로웠던 시기가 자주 찾아왔다. 내 정신을 붙들고 나를 질질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마다 통역 연습을 국대 준비하는 운동선수에 비교하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어차피 통역 연습을 한 시간 더한다고 더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시간 빼먹는다고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일의 잠깐의 통역 연습이 쌓여 결국에는 한 번에 그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입시 준비 때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왜 나는 행복하지 않느냐라는 생각에 몰두된 적이 있었다. 지난 생도 시절, PX에 가는 것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고 가방을 들고 모자를 쓰는 방식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어 모든 자유가 박탈됨에 괴로워하던 나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생각을 매일 하며 어디서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일 다양한 것에 문을 두드렸다. 엄마아빠에게 학교를 퇴교하겠다고 매일 그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힌 시간, 부모의 돈을 뜯어내 닥치는 대로 물건을 구매하고 후회하던, 폭식증에 시달려 험하게 변해버린 내가 했던 모든 행동에 내가 행복하기 위해 이걸 한다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합리화를 했고 이는 어쩌면 나 자신을 행복이라는 단어에 옭아매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퇴교하고 철학과에 진학하겠다”라는 헛소리를 하며 엄마에게 돈을 뜯어내 닥치는 대로 구매한 철학책과 인문학책 덕분에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 같다. 그것은 무언가가 지속되는 기간도 아니고 물리적인 실체도 아니며, 그저 잠깐의 순간에 찾아오는 찰나의 것, 그리고 그것이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며 비로소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을 수도 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길을 상당히 돌아왔지만 이제 나는 행복을 더 이상 찾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드문드문 찾아와서 내가 그것에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음에 또다시 감사하며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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