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시대,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가 일본 드라마를 대체했다.
K-Drama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탐색하고 있다. 큰 틀에서 1부 정책 편, 2부 외부 환경 편, 3부 사업자의 대응 편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오늘 이 글은 2부 2장에 해당한다.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가 부도의 날을 맞았다. 불과 1년 전 OECD '선진국 클럽' 가입에 환호했던 샴페인 잔은 산산조각이 났고, '풍요와 낙관'에 대한 확신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1997년 겨울, K-드라마를 지탱하던 모든 엔진이 일제히 멈춰 섰다.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증발’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K-드라마의 젖줄이자 15년간 21배나 성장했던 'TV 광고 시장'이 하룻밤 사이에 줄어들었다. 1997년 3조 1,800억 원에 육박했던 TV 광고비는, 불과 1년 만인 1998년 약 2조 1,500억 원으로 32% 이상 증발했다. 하루아침에 1조 원이 넘는 실탄이 사라진 것이다.
1장에서 묘사했던 '압구정동 X세대'의 소비를 부추기던 화려한 광고들, 즉 자동차, 아파트, 고급 가전, 패션 광고가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광고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광고가 끊기자 방송사들은 드라마 편성을 대폭 축소했다. '올스톱'된 드라마 기획안이 복도에 쌓였고, '스타 시스템'을 지탱하던 배우들의 개런티는 지급 불능 상태에 빠졌다. 90년대 중반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트렌디 드라마, 값비싼 해외 로케이션, 화려한 세트장은 불가능한 사치가 되었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었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판타지 대신, 서민들의 팍팍한 삶과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했다. 1997년 말 시작해 1998년 내내 방영된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최진실, 박상원, 차인표 주연)는 IMF로 실직과 절망에 빠진 시청자들에게 꿋꿋한 가족애를 보여주며 최고 시청률 66.9%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는 <모래시계>를 넘어선 역대 1위 시청률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대중이 드라마에 무엇을 원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또한, 제작비가 적게 드는 스튜디오 중심의 일일극 <보고 또 보고>(57.3%)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K-드라마는 화려함 대신 '위로'와 '웃음'이라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은 무너지고 있었다. 산업 붕괴의 메커니즘은 '어음'이라는 고질적인 관행 때문이었다. 방송사들은 외주 제작사에 제작비를 현금이 아닌 6개월, 9개월 뒤에나 현금화할 수 있는 '어음'으로 지급했다. 제작사들은 이 어음을 담보로 은행 대출(어음 할인, 일명 '깡')을 받아 당장 필요한 배우 출연료와 스태프 인건비를 지급하는 '빚 돌려 막기' 구조였다. IMF가 터지자, 은행은 대출을 전면 중단했고 방송사들은 어음 결제를 미루거나 부도 어음을 남발했다.
제작사들은 당장 현금이 돌지 않아 스태프들에게 돈을 주지 못하고, 은행 빚도 막지 못해 그대로 연쇄 도산했다. 방송사 앞에는 광고를 달라는 PD들이 아니라, 어음 할인을 막지 못해 부도 위기에 몰린 납품업체와 외주 제작사 대표들이 몰려들었다. 현장에서 일하던 스태프들은 일자리를 잃고, 배우들은 수천만 원의 출연료를 받지 못한 채 업계를 떠나야 했다.
<모래시계>의 신화를 썼던 김종학 프로덕션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8년, 김종학 프로덕션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100억 원대의 제작비로 이병헌, 심은하 등 초호화 캐스팅을 동원해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백야 3.98>을 제작 중이었다. 하지만 IMF 한파로 광고가 끊긴 방송사(SBS)가 제작비 지급을 중단하면서, 이미 막대한 돈을 쓴 김종학 프로덕션은 수십억 원의 빚을 떠안고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모래시계'의 성공 신화조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가 업계 전체를 휩쓸었다.
'풍요의 시대'에 맞춰 잔뜩 부풀려졌던 방송 산업 전체가 붕괴 직전의 공포에 휩싸였다. K-드라마는 말 그대로 '절망의 겨울'을 맞았다. 2025년 현재의 위기만큼이나 당시 방송산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모든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현금이 필요했다. 특히 무너진 원화 가치 속에서 '달러(USD)'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생명줄이었다. 바로 이 절박함이 K-드라마의 항로를 180도 바꾸는 '역설의 순간'을 만들었다.
1997년 초, 1달러에 800원대였던 원화 가치는 IMF 직후 1,700원, 한때 2,000원 가까이 폭락했다. 이는 대한민국 모든 자산 가치가 달러 기준으로 '반값 이하'로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K-드라마'라는 문화 상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전까지 방송사들은 드라마를 '수출 상품'으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내수 시장(광고비)이 워낙 거대하고 강력했기에, 굳이 해외에 헐값으로 팔 이유가 없었다. 현재의 영화 시장과 같았다. 안정적으로 국내 시장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해외 시장까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국내 광고 시장이 붕괴된 지금, 단 한 푼이라도 건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야 했다.
방송사 국제부 직원들은 '글로벌 세일즈맨'으로 변신해야만 했다. 그들은 창고에 쌓여있던 드라마의 베타맥스 테이프와 VHS 샘플을 가방에 쓸어 담아, 홍콩, 싱가포르,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아 콘텐츠 마켓(ATF 등)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목표는 거창한 '문화 수출'이 아니었다. 당장의 '현금 확보', 단돈 100달러라도 벌어와야 한다는 '생존'이었다.
돌이켜 보면 ‘기가 막힌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1991년 제작되어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랑이 뭐길래>가 1997년 중국 CCTV에서 방영되었다. 시청률은 무려 4.2%다. 4.2%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당시 12억 인구의 중국 시장에서 4.2%는 1억 5천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3배가 넘는 수치였다. CCTV의 보수적인 편성 속에서 외국 드라마가 동 시간대 1, 2위를 기록한 이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왜 중국인들이 이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가?’라는 분석 기사가 쏟아졌다. '한류(韓流)'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물론 <사랑의 뭐길래>는 IMF 사태 전에 체결된 계약이다. 그 대가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산업적으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IMF로 인해서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하는 국내 사업자들의 눈을 띄게 만들었다.
IMF로 낮아진 가격, 반면에 시장에 테스트해 볼 만한 사례(<사랑이 뭐길래>)는 해외 사업자들도 한국 콘텐츠를 거부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별은 내 가슴에>(1997)의 수출이었다. <사랑이 뭐길래>가 '현상'을 만들었다면, <별은 내 가슴에>는 '팬덤'을 만들었다.
이 드라마의 수출은 K-드라마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발견하게 한 '사건'이었다. 1998년 전후로 대만과 중국 본토에 수출된 <별은 내 가슴에>는 주인공 차인표가 아닌, 서브 남자 주인공이었던 '안재욱'을 폭발시켰다. 당시 그의 중국 이름 '안짜이쉬(安在旭)' 신드롬은 상상을 초월했다. 욘사마 이전에 안짜이쉬가 있었다. 반항적인 눈빛과 긴 코트, '강민 머리'로 불린 독특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무엇보다 극 중에서 그가 직접 부른 OST 'Forever'는 아시아 전역을 강타했다. K-Pop과 K-Drama의 합체였다.
중국 팬들은 드라마 속 '강민'과, 그를 연기한 '배우 안재욱'과, 노래를 부른 '가수 안재욱'을 동일시했다. 그는 K-드라마가 낳은 최초의 '멀티태이너(Multi-tainer)' 스타였다. 1998년, 안재욱은 K-POP 가수가 아닌 드라마 배우로서, 한국 최초로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수만 명 규모의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IMF로 모든 것이 얼어붙은 한국에, 그는 중국 CF 시장을 휩쓸며 막대한 '달러'를 벌어다 주었다.
이는 방송사 세일즈맨들에게 충격적인 '각성'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드라마 테이프'라는 물건을 팔러 다녔다. 하지만 안재욱의 사례는, '드라마'는 '스타'를 파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그 '스타 팬덤'을 통해 음반, 콘서트, 광고라는 2차, 3차 부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한류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을 눈앞에 증명해 보인 것이다. IMF의 '헐값 투매'라는 절박한 행위가, 역설적으로 K-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무기(스타 팬덤)를 발견하게 만든 순간이었다.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의 바이어들 눈에 'K-드라마'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이들 시장은 편당 수만 달러를 호가하는 일본 트렌디 드라마나 홍콩 무협 드라마가 장악하고 있었다. K-드라마는 1장에서 보았듯이 품질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비싼' 일본 드라마와 경쟁해야 하는 '애매한' 위치의 콘텐츠였다.
하지만 IMF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원화 가치가 반 토막 나면서, K-드라마의 달러 표시 가격 역시 '반값 이하'로 폭락했다. 아시아 바이어들에게 이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예를 들어, 편당 1만 5천 달러를 부르던 일본 드라마 대신, 품질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편당 2,000~3,000달러에 불과한 K-드라마를 수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K-드라마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일본 콘텐츠가 독점하던 아시아 시장의 진열대에, 'K-DRAMA'라는 새로운 상품이 '가격 경쟁력'이라는 무기를 들고 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겨울이었지만, 싹이 트기 시작했다. 방송사들은 '헐값'이라도 달러를 벌기 위해 팔았고, 아시아 시장은 '헐값'이기에 K-드라마를 사들였다.
이후 시장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이 '우연한 만남'의 결과는 놀라웠다. 싼 맛에 K-드라마를 접했던 아시아 시청자들이 그 '품질'에 눈을 뜬 것이다. 1장에서 축적된 K-드라마의 DNA—빠른 속도감, 세련된 영상미, 배우들의 폭발적인 감정 연기, 중독성 있는 OST—는 기존의 느린 일본 멜로드라마나, 홍콩의 무협물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었다.
K-드라마의 수출액은 이 각성 효과를 숫자로 증명한다. IMF 이전, 방송 프로그램 수출액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연간 약 1,000만~1,300만 달러 수준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산업'이라기보다는 '문화 교류'에 가까운 미미한 수치였다.
그러던 것이 1998년, 달러 확보를 위한 '헐값 투매'가 시작되며 약 1,500만 달러로 소폭 증가하더니, 'K-드라마가 팔린다'는 것을 확인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1999년, 총수출액은 약 2,100만 달러로 뛰어오른다. 불과 2년 만에 거의 두 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IMF 위기가 극복되고 원화 가치가 정상화된 2000년대 초반, K-드라마는 더 이상 '싼 맛에 보는' 콘텐츠가 아니었다. 2000년의 <가을동화>, <이브의 모든 것> 등이 1차 한류를 이끌었고, 마침내 <겨울연가>(2002년)가 일본 NHK에서 방영되며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그 신호탄이었다. 이는 K-드라마가 아시아 시장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수출액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3년 (<겨울연가> 히트 직후): 약 5,300만 달러 (4년 만에 2.5배 성장)
2005년 (<대장금> 히트): 약 1억 2,000만 달러 (다시 2년 만에 2배 이상 폭증) <대장금>은 아시아를 넘어, 중동의 **이란에서 시청률 80%**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K-드라마의 영향력이 아시아를 넘어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2012년 (K-POP과 동반 성장): 약 2억 3,500만 달러
'한류'가 산업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 시장은 K-드라마의 가장 큰 고객이 되어, 2010년대 중반까지 K-드라마 수출액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흐름 역시 또 다른 '외부 환경'에 의해 가로막힌다. 2016년, 사드(THAAD) 배치 결정으로 인한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은 K-드라마의 가장 큰 수출길을 막아버리는 정치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IMF가 절망 속에서 '수출'이라는 문을 강제로 열었다면, 한한령은 가장 화려했던 시장의 문을 강제로 닫아버린 사건이다. 이는 K-드라마의 운명이 여전히 '외부 환경'이라는 거대한 바람의 항로 위에 놓여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리고 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이 닫혔을 때, K-드라마는 생존을 위해 또 다른 문을 찾아야만 했다.
<K-영상산업의 성공 비결>(The Secret behind Global Success of K-Drama)는 매주 찾아옵니다.
서문: K-영상산업의 성공신화: 그 비밀을 파헤치다
Part 1. K-드라마 성공 신화의 정책 기반
1. 검열폐지, 창작자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다.
2. 3% 나비효과, 외주 제작 의무화 정책이 산업을 만들다
3. 보도 권력을 통제하려다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다
Part 2. K-드라마 성공을 이끈 내외 환경
1. 들끓는 욕망이 이끈 TV 시대
2. 절망의 겨울, 역설의 싹이 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