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MI Jul 14. 2021

여행은 그렇게시작되었다.

   당당했던 내가 언제부터 초조함을 갖고 살았는지는 지금 돌이켜보면 알 수는 없다. 20대 때는 열정이 과할 정도로 넘쳤다. 그때는 무엇이든 자신 있게 해내곤 했다. 30대의 몇 해가 지났을 때의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책임감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는 숨어버렸고, 누군가를 막아서고 지켜줘야 하는 자리에서도 그저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이런 나 자신을 어떻게든 바꿔보기 위한 시도는 지속했었다. 노력에 비하여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차라리 성과가 없었던 거라면 더 좋았으리라. 실패했고, 포기되었다. 

   나의 열의 세 곱절의 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노래 가사의 한 구절처럼 내뿜은 담배 연기가 점점 더 멀어진 듯이 나의 목적이 흐려져 갔고, 손에 잡혀 빛을 잃어버린 반딧불이처럼 흐려져버린 이상은 점점 더 빛을 잃어 갔다. 그런 내가 2016년 그러니까 33살 여름에 갑자기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분명 지속적인 심리적 패배 상태에서 도망가고 싶었으리라.


   당시로는 떠나야 하는 이유보다는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더 많았다.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살면서도 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은 신기루 같은 미래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단절이 필요했다. 늘 불안해야 하는 삶을 짧은 시간이나마 끊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싶었다. 시간의 흐름에 그저 잉여처럼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도 싫었다. 그러기에 입버릇처럼 한 달이라도, 두 달이라도 여행 가겠다는 농담을 마치 희망처럼 믿었다. 그런 믿음은 어느새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내 이 여행만이 나를 구해 줄 하늘이 내린 동아줄이라고 확신하며 덥석 잡은 것이다. 


   그동안 뭐 그렇게 바쁘게 살아온 것인가? 여행을 준비하면서 누구나 하는 푸념을 내뱉는다. “참 하는 것 없이 일만 하며 바쁘게 살았다.”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없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마음이 시간을 품어 줄 수 있을 만큼 넓지 못했기에 시간과 공간이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출발을 앞두고 보니 그동안 두 손에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던 것들은 다 사라졌다. 나의 손에 쥐고 있던 것은 겨우 인도 비자와 항공권, 동생이 선물로 준 90L 배낭 그리고 여행자금 400만 원이 전부였다. 이 정도면 인도에서  한 세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장기간 여행을 해본 적이 없기에 금액에 한정을 두고서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돈이 떨어지면 입국할 것이다. 늘 시간에 쫓기는 삶이었기에 이런 방법이 훨씬 마음이 놓인다.


불 꺼진 중국 청도 공항 (환승)

   막상 떠난다고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기대하며 가슴이 뜨거웠다. 분명 그러했다. 발걸음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심각해졌다. 걸음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 그 생각의 무게 또한 늘어난다.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서 인가? 이제는 어디로 잠깐 떠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그런 나이가 된 걸까? 여행하는 지역이 그리 쉬운 여행지가 아니라서 일까? 얼굴에는 기쁨과 흥분의 감정적 표정보다는 중압과 지침의 육체적 표정으로 가득했다. 생각의 무게로 인해 진통이 올 때면 ‘히, 히, 후’ 하고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들이마시며 고통을 참아본다. 흐려져버린 이유와 목적의 출발은 그저 현실로부터 도피와 같이 느껴졌다. 


   준비 당시에는 큰마음을 갖고 했다. 이 선택을 결정했을 당시만 해도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다녀와야 하는 목적도 분명했다. 많은 결과들을 내고 싶고 스스로에 대한 변화도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번지르르한 말들로 자위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출발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그것도 나를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잘 다녀오라며 등을 두드렸다. 정신 좀 차리고 오라는 중의적 표현인지, 아니면 하든일 그만두고 자리도 아직 못 잡고 있으면서 여행을 가겠다는 투정 부림에 질려 버린 것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여행의 이유로 제시했던 거품과 같던 목적이 그들에게 합리적이게 들렸던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응원을 보냈다. 감사한 일이지만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불안해할 뿐이다. 지금 이런 불안감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그 해 지난여름 가장 더웠던 날이다. 분명 그날이다. 뜨거운 태양을 발아래 두고 걸을 수밖에 없었던 날이다. 그때인 것 같다. 그날의 뜨거움은 밀랍을 녹이듯 나의 기대와 확신을 녹여버렸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