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딴짓 Jun 20. 2024

오늘 나는 공벌레가 되었다

돌돌 말린 공벌레

미용사 시험은 국가 자격 평가이다. 그러니까 준비물이 뭐다? 컴퓨터펜? 그건 모르겠고 신분증!



"엄마 나 학생증 필요해. 아님 청소년증."

오늘 아침, 아들이 말했다.


"안 만들었어? 엄마가 만들라고 백 번 얘기했잖아."

"안 만들었는데? 여권은 없어?"

"네 여권 만료됐는데? 코로나 때 여행 못 간 사이에."  

"아니 왜 여권이 만료돼? 말이 돼?"

아들은 도리어 화를 냈다.



카리스마든 위엄이든 1도 없는 엄마인 나는 아침 아홉 시가 되자마자 부리나케 학교와 은행에 전화를 걸어 청소년증이나 학생증의 당일 발급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굽실굽실. 결과는 물론, 안 되지. 잠시 고민했다. 출근을 째고 시청으로 날아간다. 아, 그전에 당장 아들에게 여권용 사진을 찍게 한다. 거금 오만 원을 들여 1회만 사용할 수 있는 긴급 여권을 만든다. 오후 1시까지 송파의 시험장으로 날아간다…… 쯧.



그렇게 오늘 아들은 학교와 미용 시험을 쿨하게 쨌다.





꼭 닫힌 아들의 방문에 공허한 시선을 던진 후 집을 나왔다. 출근 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시간, 상사에게는 이미 연락을 해 두었다. 오늘은 야근이군. 출근길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벌레 같아. 그… 쪼그맣고 톡 건드리면 동그래지는 거.



무표정하게 창 밖을 응시하다 떠오른 그거. 공. 벌. 레.



누가 톡 치기만 해도 1초 만에 몸을 말아버리는 콩알만 한 녀석. 건드리기만 해 봐, 내 몸을 세상에서 가장 조그맣게 만들어 버릴 테야. 내 안은 소심함과 두려움으로 헐떡거리지만 밖은 딱딱하게 만들 거야. 세상은 내게 말하겠지, 야 콩알, 너 뭐 하냐? 뭐라는 거야? 안 들려.  



오늘 아침도 나는 그렇게 우울해졌다. 창문에 기대며 공벌레처럼 움츠렸다.





‘천재작가 김나정’

스마트폰에 뜬 이름에 가만히 폰을 들었다.  



“잘 지내세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



우리는 작년에 온라인 글방에서 만났다.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다. 그녀의 글을 읽고 심상치 않은 내공을 감지한 나는 그녀가 수년간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독서토론모임을 진행해오고 있으며 그 기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공부를 해온 사실을 알고 탄식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신비롭고 입체적인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천천히 친해지며 혼자 기뻐하고도 싶었다. 나만의 그녀로 숨겨두던 어느 날 그녀가 대단한 문학상을 받으면 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짠 하고 나타나 맨 앞에서 축하해 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때부터 내 폰에 저장된 그녀의 이름은 ‘천재작가 김나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글방에 올린 내 글에 울음이 묻어났는지 그녀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따로 연락해 본 적은 없는 사이.



제가 있잖아요. 얘기할 사람이 필요할 저한테 전화하세요.”



아들에 대한 나의 푸념을 한참을 들어주던 천재작가는 그렇게 다정스럽기까지 했다. ‘바로 뒤에 있어요.’ 내 멋대로 그렇게 들렸다. 만난 적이 없다. 멀리 떨어져 산다. 아주 가끔 연락한다. 그럼에도 거기 그녀가 있음을 안다. 마음으로는 언제나 내가 달려갈 수도, 그녀가 달려올 수도 있음을 안다.






2050년에 전 세계의 90퍼센트가 사막화가 된다는데, 인구 절반이 물 위기에 처한다는데 미용시험 한번 못 본 게 무슨 대수야. 버스에서 내리며 좁디좁은 마음길이 조금 펴졌다. 그렇게 공벌레의 몸도 조금 펴졌다.



오늘도 불쑥 나타난 인간 안전망의 도움으로 나는 별다른 심리적 탈선 없이 하루를 보냈고, 효자 아들에게서 받은 깜짝 글감 선물로 무사히 글을 쓸 수 있었다.



어찌나 기특한지.


이전 10화 웬수와 살아내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