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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Jul 01. 2024

내일의 여행과 오늘의 산책

3개월 20일

원래 게임이 취미였는데, 이제는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임신 기간에는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어서 게임을 했다. 자궁경부 길이가 짧으니, 조산을 방지하려면 최대한 누워있어야 한다고 병원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자궁을 물풍선으로 비유하자면, 입구가 묶여있기는 한데 너무 짧게 묶여 있는 상태였다. 자칫하면 매듭이 솔솔 풀려서 물이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에 물풍선 입구가 아래로 가게 똑바로 세우면 안 되고, 눕혀라도 놔야 최대한 매듭이 덜 풀린다는 셈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누워서만 지내면 우울해질 게 뻔했다. 태교는 둘째치고 내게 너무 안 좋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현실 세계 대신에 오픈월드 RPG 게임을 하면서 게임 속 세상을 산책하고 다니기로 했다.


그렇게 <원신>이라는, <젤다의 전설> 짝퉁이라고도 불리는 게임을 했다. 원래 계획은 하루에 30분 정도만 기분 전환 삼아서 플레이하는 것이었는데, 하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일일 퀘스트는 그날 그날 갱신되고, 마을 사람들이랑 얘기도 해야 하고, 메인 스토리도 밀어야 하고, 캐릭터 육성하려면 아이템 파밍도 필요하고……. 눕눕 임산부 처지인 나는 여유롭게 몇 시간씩 하고 있다지만,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업을 겸하면서도 게임 진도를 쑥쑥 빼는지 신기할 정도로 콘텐츠가 많았다.


그러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로는 게임에서 깔끔하게 손을 뗐다. 어차피 눕눕 생활 버텨보려고 시작한 게임이었고, 출산 후에는 몸 건사하면서 아기 돌보고 육아 공부도 하려니 하루가 정신 없이 지나갔다.


다시 게임을 시작한 것은 산후도우미님이나 남편과 친정 어머니 도움을 받아가며 어느 정도 육아에 손이 익을 때쯤이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마음 놓고 퀘스트 깨러 다닐 수는 없었기에, 터치 몇 번 해두면 하루이틀 후에 아이템이 제작 완료가 된다거나 하는 자동 콘텐츠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게임에서 자동 요소를 운영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시간 부족으로 스토리도 밀지 못하고 육성 재료도 파밍하지 못할 거면, 대체 게임을 왜 하나? 예전에는 가상 세계를 모험하는 맛으로 했다지만, 이제는 그냥 뺑뺑이에 불과한 것을.




요즘에는 게임 대신에 책을 더 많이 읽고 있다.


책도 게임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콘텐츠를 즐기기만 하는 취미 생활인데, 희한하게 이쪽은 보다 더 의미도 있고 보람찬 기분이 든다. 어쩌면 독서는 게임과는 다르게 현생과 어떻게든 맞닿아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여행기를 읽으면 여행을 떠난 듯 하고, 경제/경영 서적을 읽으면 실생활에 얼른 적용해보고 싶어졌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면, 일단 흥미로운 것은 물론이고, 이 다음에 글을 쓸 때 따라하고 싶은 요소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참 쉽다 아이와 해외여행>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이와 해외여행이라니, 궁금했다. 내 아이는 이제 갓 백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아이와 외출을 하고 싶었어도, 아기들은 면역력이 약하니까 백일은 지나고 하라던 조언을 충실하게 따라왔다. 그래서 100일 동안 집에서 칩거생활을 했더니만, 웬걸 이제는 ‘아기를 데리고 외출이라는 것을 할 수 있나?’하고 의문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기와 함께라면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유포트도 없는 집 밖에서 분유나 이유식을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들 많은 데서 갑자기 울면? 똥기저귀 갈아야 할 일이 생기면 공용화장실 세면대에서 대변을 씻겨도 되나? 그나저나 지금 아기는 고작 1시간 정도밖에 깨어있지를 못하는데, 낮잠 시간이랑 외출 시간을 조율하는 것부터가 일이네. 그 밖에도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럼 또 어떡하지?


그런데 아이와 함께 해외여행이라니. 동네 마실도 아니고, 해외여행이라니! 아직 기저귀도 못 뗀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저자는 몸소 아이를 데리고 다낭이며 몰디브, 싱기포르 등을 여행했다.


물론 그 동안 내가 했던 여행들에 비하면 ‘휴양’에 가까운 여행기였다. 하지만 아기를 데리고 어딘가를 다녀오는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란 사실을 책 덕분에 깨달았다. 이따금, 당연한 이야기일지라도 조금 반신반의하다가 결국에 누군가가 직접 해봤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제서야 실감이 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책을 읽고 나서, 아이와 첫 외출을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 누구는 아기를 데리고 해외여행도 다녀오는데. 그렇게 보면 동네 마실 정도는 정말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기를, 아기 동반한 첫 해외여행을 회고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못 갈 정도인가?’하고 자문해봤는데,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무엇이든 하면 할수록 요령이 생기는 법이고, 요령이 생기면 자신감은 따라왔다. ‘그래, 처음이 힘들 뿐이지 산책 다녀오는 것쯤은 누구나 하니까’ 하는 마음으로 아기띠를 챙겼다.


목표는 아침 첫 수유를 하고 나서 빽다방 다녀오기. 외출을 위해 아기의 맨다리에 바지를 입혀주고 아기띠를 둘렀다. 유모차에 태웠다가는 아이가 울면 한 손으로 유모차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들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집을 나섰더니 빽다방은 아직 오픈 시간도 아니었다. 시계를 봤다. 오전 7시 반이었다. 휴직한 지 오래됐더니 현실 감각이 없어졌구나.


계획을 바꿔서, 빽다방보다는 조금 멀지만 그래도 가까운 편인 단골 카페를 향했다. 다행히도 딱 7시 반에 오픈하는 가게였다. 평소보다 훨씬 주의를 기울이며 차도 조심하고 길거리 흡연자도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카페에서 아이스 라떼를 겨우 테이크아웃 해왔다.


집에 왔더니 나도 모르게 땀이 엄청 나 있었다. 실제로 살짝 더운 날씨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행여 아기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긴장을 많이 했다. 실제로도 길 한복판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못 제쳤기에 속상했고, 아기띠에 가려서 카페 입구의 단차를 보지 못해 살짝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아기띠를 했기에 망정이지, 두 팔로 안아들고 있었다면 아이를 놓칠 뻔했다.


그래도 아기가 모기 한 방 물리지 않고 집에 잘 돌아왔으니 전반적으로 괜찮은 첫 외출이었다. 게다가 아기를 흘끔흘끔 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꽤나 즐거웠다. 귀여운 포켓몬을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세상 사람들, 여기 보세요. 정말 귀여운 아기죠? 제가 낳았답니다!




외출도 하고 책도 읽다 보니, 나중에 아이가 좀 더 크면 해외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슬슬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아과 가는 일조차 크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잘만 하면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 어리면 호텔 수영장 휴양밖에 못 할 테고, 아기도 여행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나중으로 미루면 그 때는 아이 학교 일정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겠지?


그럼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아이가 7살 쯤 휴직을 한 번 더 해서 여행을 데리고 다닐까나……. 만약 그 일 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랑 여행을 다녀본다면 아마 인생의 값진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아이에게는 카메라를 쥐여주고서 사진을 찍게 하고, 숙소에 돌아오면 내가 아이의 사진을 곁들여서 밤마다 여행기를 써봐도 좋겠다. 그 기록들을 모아서 아이와 함께 책을 공동 집필해도 재미있겠는걸?


그런 상상을 하면서 아이에게 분유를 먹였다. 어쩐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여행을 갈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힘들겠지.


하지만 이렇게 하루종일 아이를 끼고 사는 기간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굉장히 짧을 게 분명했다. 두 돌에서 세 돌만 되어도 아이는 분유나 이유식 대신에 일반식을 먹고, 의사표현도 웬만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어른들이 사회 생활 하는 것처럼 본인도 어린이집을 다녀오는 일상을 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빨리 7살이 되도록 시간을 당길 방법도 없지만, 아이가 천천히 크도록 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머릿속에 문득, 예전에 뉴스에서 봤던 쓰나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허리케인처럼 격렬하게 몰아치지는 않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기세로 묵직하고 꾸준하게 육지 쪽으로 밀고 들어오던 바닷물의 모습이.  

내가 복직을 하든, 아니면 아이가 훌쩍 크든, 이렇게 작고 따뜻한 몸을 꼭 껴안고 밥을 먹여주는 일상은 앞으로 길어야 몇 달이겠구나……. 그런 생각에,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는 분유를 먹이다 말고 아이를 끌어안아주었다.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Paul Hana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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