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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Jul 16. 2024

바벨탑의 어머니

3개월 29일

바벨탑은 언어 때문에 망했다고 들었다.


옛날 옛적에, 감히 신에게 닿으려는 의도로 인간들은 높디 높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은 이를 괘씸하게 여겼고, 바벨탑을 만들던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언어를 쓰도록 만들어 버렸다.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바벨탑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아기를 키우면서 나는 바벨탑이 몇 번이고 떠올랐다. 예컨대, 피곤해 죽겠어서 소리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낮잠 재울 때도 ‘바벨탑……’ 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피곤할 때는 자야 하고, 자려면 그렇게 비명을 지르거나 발차기를 하면 안 된단다, 아가야”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 없었다. 대신에 말 못 하는 아기의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눈 감아~ 눈을 감아~”하고 혼잣말 같은 말만 반복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바벨탑 모드였다. 아니, 정확히는 아침이 아니라 새벽부터였다. 원래 아이의 목표 기상 시각은 아침 7시로 하고 있었다. 뭐,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아이가 스스로 목표를 세웠을 리 없으니, 목표라기 보다는 그저 우리 부부의 염원이랄까……. 아무튼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오늘 아이는 새벽 5시에 깼다.




아이는 완전히 깨기 전부터 새벽에 종종 깨서 칭얼댔고, 그 때마다 우리는 쪽쪽이를 물려줬다.


배고파서 울 때는 “끄응, 끙”이 아니라 “쩝쩝 으어으엉”하는 소리를 냈는데(물론 이것도 내 추측이지만……), 요즘에는 새벽에 쩝쩝 소리만큼은 들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새벽 1시, 3시, 4시, 이런 식으로 아이의 칭얼거림이 들려왔고, 그 소리가 강성울음으로 번져서 확 잠을 깨지 않도록 살살 눈치를 살펴서 쪽쪽이를 물려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에는 기상 시각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아침 7시 쯤에 깨곤 했다. 어떤 때는 7시 반에 깨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침 6시 반, 6시, 이런 식으로 점점 줄어들다가 오늘은 비로소 새벽 5시를 찍어버렸다.


새벽 5시는 좀 너무했다. 6시도 아니고, 5시라니? 나와 남편이 잠을 자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일찍 깨버리면 하루 일과가 전체적으로 1~2시간씩 당겨지는 게 문제였다. 그러면 자연히 취침 시각도 당겨지고, 그만큼 다음 날 기상 시각은 또 당겨지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루나는 오후 7시 반에 저녁 먹고 이튿날 아침 6~7시에 일어나던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그런데 이런 기세라면, 앞으로는 오후 5~6시에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떡실신을 한 탓에 새벽 3~4시에 깨서 말똥말똥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기가 자꾸 새벽에 일찍 깨고 있어…….”


고민을 털어놓자, 육아 동지인 직장 동료는 나에게 ‘종달 기상’이라는 개념을 알려줬다. <똑게육아> 책에서 나오는 개념인 것 같은데, 종달새처럼 새벽 4~5시에 일어나버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었다. 분명 내가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은 책이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또 생소했다. 역시 사람은 뭐든지 자기 일이 되어봐야 비로소 진심으로 학습한다.


블로그와 카페들에서 ‘종달 기상’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내가 뭔가 특별히 잘못해서 이리 된 게 아니라, 굉장히 보편적인 일이었구나. 분석한 원인도 여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여름이 되면서 아침 해가 일찍 떠서 일찍 깨는 것’이라는 가설이 내 상황과 가장 잘 맞아 보였다. 암막 커튼을 알아봐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이렇게 인터넷을 검색하던 시점이 바야흐로 아이를 하루의 첫 낮잠을 재워둔 오전 시간이었다. 나름 우리 부부는 머리를 써서 이래저래 뭉개가며 첫 수유를 6시 반에 했고, 나는 시치미 뚝 떼고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고 카페를 다녀와서 첫 낮잠 시각을 평소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둔 상태였다.


물론 새벽 5시에 깨서 옹알거리던 아이 입장에서는 깬 지 2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부모가 낮잠도 안 재우고 미적거리고 있으니 ‘이게 무슨 상황……?’하고 혼란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깨어있는 시간을 맞춰놓지 않으면 하루가 완전히 무너져서 이따가 아이의 밤잠 입면 시각에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그러나 아이는 연속으로 30분만에 낮잠에서 깨어나며 모친의 얄팍한 술수를 모두 돌파했다.




원래 같았으면 1시간씩은 자던 아이였는데, 30분만에 깨다니. 이래서는 평소와 같은 4시간 수유텀과도 어긋나지고, 활동 시간에 쌓인 피로도 제대로 풀지 못해 아이도 힘들어할 게 분명했다.


또다시 바벨탑이 떠올랐다. 아가, 지금 낮잠을 좀 더 자야 피로가 싹 풀리지. 새벽에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가, 아직 새벽 5시밖에 안 됐으니 1시간만 더 자고 일어나자. 물론 너는 시계도 볼 줄 모르고, 새벽 5시건 6시건 네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겠지만…….


하지만 그런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직 한참 무리였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려면 적어도 두 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다. 아직 만 3개월밖에 안 됐는데, 앞으로 2년을 더 이런 바벨탑 상태로 버텨야 한다니? 일부러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어서 아기에게 훨씬 더 성심성의 모드로 대하게끔 하는 것, 혹시 그게 신의 의도였으려나?


아이는 그저 푹 자고 일어나 개운하다는 듯이 침대에서 활짝 웃었다. 그래, 울면서 깨지 않는 게 어디니. 네가 개운하고 기분 좋다면, 그리고 나를 그렇게 반갑게 맞이해 준다면, 텀이고 뭐고 무엇이 문제겠니.


그러나 아이는 이후 낮잠을 서럽게 울면서 깼다.




대체 왜 울면서 깨는 걸까?


1시간 동안 라라스 베개에서 쿨쿨 잘만 잤으면서,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아이는 “으어어어어엉!”하며 우렁차게 울었다. 웬만큼 칭얼대는 소리였다면 얕은 잠 구간을 혼자 힘으로 건너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을 텐데, 이건 누가 들어도 귀청 떨어지는 강성 울음이었다.


이럴 때는 무조건 라라스 베개에서 아이를 꺼내서 세워 안아 들어야 했다. 그것도 바로 달래지지가 않으니 아이에게 말도 걸고 노래라도 부르면서 마음의 여유를 좀 가져야 한다. 그렇게 바운싱도 살짝 주고 다정하게 말도 붙이면서(보통 “오이오이 그래 왜 그렇게 울어 악몽을 꿨어” 하는 내용), 한참을 달래주면 아이는 훌쩍이며 진정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10시 반. 아니 설마, 6시 반에 밥 먹고 낮잠 딱 자고 일어났더니 수유텀이라서? 그래서 울었다? 배고파서? 눈도 안 뜨고, 허기 때문에……?


분명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이래저래 달래봤지만 도저히 울음이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분유를 태워줬는데, 그제서야 아이는 꿀떡꿀떡 먹으면서 진정되었다. 그러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도 않은 채로 엄청나게 우느라 에너지마저 소모한 탓에, 얼마 안 가 아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먹었다.




‘먹고 싶은 만큼 양껏 먹게 하며, 억지로 과식 시키지는 말자’라는 모토를 요즘 가지고 있었던 만큼, 조는 아이에게 계속 젖병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아이는 이것이 공갈 젖꼭지인지 젖병인지도 헷갈려하며 자동반사적으로 분유를 먹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210ml보다 70ml나 덜 먹었지만, 더 달라고 혀를 낼름거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으며 집안 구석구석을 엄마 품에 안겨 돌아다녔다. 사실 이 때 나는 분유 거품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해서 한 40~50ml 정도 남긴 줄 알았고,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서 그만 먹인 것이었다.


결국 아이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먹은데다가 양도 더 조금 먹은 셈이 되어버렸다. 그 탓에 평소 같았으면 오후 3시에서 3시 반 사이에 배고프다고 했을 것을, 오늘은 1시 반에 벌써 울어제끼기 시작했다. 10시 반으로부터 3시간이 지났으니, 평소의 4시간 수유텀보다 1시간이 짧았지만 아까 먹었던 양을 생각하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3시에 먹던 분유를 1시 반에 먹이면, 이따가 저녁에는 어떻게 될까? 저녁을 7시 반이 아니라 5시 반, 막 이렇게 먹게 되는 것 아니야? 그리고 그 연쇄작용의 끝에는 새벽 5시가 아니라 새벽 3시의 무지막지한 종달기상이 오는 게 아닐까?


하지만 현실을 부정해서 무엇하리. 배고파하면 먹이고, 졸려하면 재우라는 육아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는 양껏 먹었고, 거짓말처럼 오후 5시 좀 넘어서 또 먹었다. 딱 본인의 수유텀 4시간을 칼같이 지킨 셈이었다.




‘텀망진창’이라는 말을 누가 쓰던데, 그게 내 일이 될 줄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텀이 무너지는 것에 그렇게까지 절망(?)하지는 않았다. 아이는 이제 백일이 훨씬 넘어서 만 4개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60사이즈 옷이 작아져서 70사이즈로 갈아탄지 오래였고, 낮에는 바운서에 누워서 파닥이기보다 매트에서 뒤집으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아이는 눈부시게 나날이 성장하고 있고, 아이의 생활 패턴은 필연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맞닥뜨리니 쉽지가 않았다. 예측 가능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다음 수유는 몇 시에 하게 되려나? 그걸 미리 생각해둬야 나중에 엄청 울기 전에 알아채고 밥을 줄 텐데. 그럼 그 시간에 맞추려면 얼마 동안 놀게 하고 언제 낮잠을 재워야 하지? 그나저나 이러다가 저녁 마지막 수유가 너무 늦어지는 거 아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러가지 돌발 이벤트도 발생했다. 아이가 응가하면서 기저귀가 샜는지 등에 대변이 묻었고, 그 탓에 옷과 기저귀 갈이대의 방수포에도 대변이 묻었다. 게다가 평소에는 안아서 살살 돌아다니면 웬만큼 낮잠을 잤는데 오늘따라 아이는 안겨서도 입면을 힘들어하고 잠투정이 심했다.


원래 같았으면 오후 5~6시 사이에 친정 어머니께서 아이 낮잠을 재워주실 동안에 나는 저녁 식사를 마쳤을 텐데, 오늘은 돈까스 한 입 먹고 일어서고 밥 한 술 뜨고 일어서느라 식사에도 한참이 걸렸다. 그나마 친정 어머니께서 아이 대변도 닦아주시고 아기띠로 낮잠도 재워주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난 쫄쫄이 굶은 채로 아이를 영원히 달래느라 진땀 뺐을 게 분명했다.




친정 어머니께서 거의 모든 일을 해주셨지만, 그래도 어쩐지 오후 7시쯤이 넘어가면서 나는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졌다.


그 때 다행히 남편이 오늘따라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고, 친정 어머니께서는 남편에게 바톤을 넘겨주며 퇴근(?)하셨다. 나는 우선 남편에게 저녁을 먹으라고 하고, 할머니에게 안겨 자고 있는 아이를 받아들어서 그대로 살랑살랑 흔들며 재워주었다. 하지만 자세도 영 불편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아이를 데리고 살살 일어나 범퍼침대로 옮겨가 전자책 단말기 하나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책을 읽으며 아이를 한 30분 정도 재워줬다. 처음에는 움찔움찔 하면서 깰락말락 하더니, 아이는 어느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빨고 있는 듯한 쪽쪽이도 “뽁”하고 뽑아주었는데, 전혀 깨지 않고 오히려 입 벌린 채로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조그맣고 동그랗게 말린 뽀얀 아기 손. 내 손과 동일한 ‘손’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최대한 귀엽고 작게 만들어봐야지’하는 마음을 먹고 만든 인형 같았다.


아이의 따스한 체온과, 더 이상 신생아처럼 흐느적거리지 않는 체구의 무게가, 아이를 안은 품과 목을 받쳐준 팔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 귀엽고 작은 입으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다니. 아이고야, 나도 나지만 네가 제일 고생했겠구나.




늦은 막수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어쩐지 아이를 깨우기가 미안해서 10분을 더 껴안고 재워주었다. 그러다 역류 방지 쿠션에 살포시 내려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등센서가 작동하면서 잠시 후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는 남편과 함께 아이에게 인사를 했고, 목욕 준비를 하면서 아이가 터미타임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엎드린 채로 바짝 고개를 들고서, 살짝씩 웃으며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는 아기 루나. 그 모습이 너무도 귀하고 기특해서, 나는 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이번 생에 할 일은 거의 다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나는 이 아이를 ‘키우는 일’을 마저 해야 한다며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쯤이 되면 나는 이 아기를 더 이상 아기가 아니구나 싶어할까? 드디어 말문이 트이게 되면? 책가방을 들고 자기 스스로 등교를 하면? 어쩌면 중학생이 되고, 성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아이는 내 눈에 아기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다 큰 아이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나 지금의 아기 적 모습을 찾아낼 것만 같다.


그래, 언제까지 네가 하루에 분유 180ml씩 네 번 먹는 아기이기만 하겠니. 네가 변하는 모습을 온전히 기쁜 마음과 담담한 양육자의 태도로 받아들이며 즐겁게 지내야지. 물론 당장 내일은 네가 새벽 몇 시에 일어날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야.



 * 표지사진 출처: Pixabay의 G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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