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의동 에밀리 May 20. 2024

숱과 탈모의 싸움

2개월 22일

“육아는 할 만해?”


나보다 몇 달 앞서 아이를 출산한 친구가 카톡으로 물었다. 


당시에는 산후도우미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못 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낮에는 아이 낮잠부터 시작해서 설거지와 청소까지 산후도우미님이 봐주셨다. 커버가 되지 않는 점은 저녁의 마녀시간에 아이의 울음을 견딘다거나 혹은 밤중에 깨서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할 때 정도?


돌이켜보면 그 때는 그냥 모유수유에만 집중해도 되었을 것 같다. 아이 수유한 다음에 바로바로 유축 한 번 씩 하고, 깔대기는 내가 씻고. 그러면서 점차 분유 비중을 줄여나갔다면 완모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설거지와 빨래, 청소까지 아이 낮잠 재우는 사이에 틈틈이 하면서 점심도 챙겨먹는다. 그러느라고 허겁지겁이 되어서 늘 숨을 얕게 쉬는 기분이 들지만 어쨌든 집안일을 다 하면서 산다. 산후도우미를 썼을 때는 서비스 종료일 후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역시 막상 닥치니까 다 하게 된다.


다만 흰머리가 조금 생긴 것 같기는 하다. 




샤워를 하고 나면 머리가 한 움쿰씩 빠져 있다. 


바로 지지난주까지만 해도 머리카락이 정말 안 빠졌다. 임신했을 때도 샤워 후에 하수구 구멍에는 몇 가닥이 걸쳐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임신하면 머리가 안 빠진다더니 정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머리가 숭덩숭덩 빠지기 시작했다. 형님, 그러니까 남편의 형수님께서 일전에 “임신했을 때는 안 빠지더니 백일 되니까 거짓말처럼 뭉텅 빠지기 시작했어요”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유념하며 회사 동료가 선물해 준 임산부용 탈모 샴푸도 총알처럼 쟁여놓고 있었기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인체의 신비가 새삼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반면에 아이는 머리숱이 나날이 풍성해져갔다. 아니, 풍성해져간다기 보다는, 원래 많았던 숱에서 하루가 다르게 길이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제 아빠보다 머리가 길어지고 옆머리는 귀를 덮는다. 조금만 더 있으면 뒷머리는 얇은 고무줄로 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소아과를 갔을 때도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분께서 “머리숱이 정말 많네요”라고 감탄하셨다. 워낙에 태어나기를 숱부자로 타고난 아이였다. 나는 평소에 ‘아기’를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이제 와서 친구들 아이 사진을 보면 비교가 확 됐다. 아버님 말마따나 머리숱만 보면 총각이었다. 


가끔은 나조차도 머리숱에 속아서 아이가 벌써 아기를 지나 어린이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직 태어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이의 머리숱은 유전이었다. 


나도 머리숱이 많은데 남편도 많은 편이었으니, 어느 쪽 유전자를 물려받더라도 탈모 걱정은 없는 친구였다. 나는 미용실을 가도 헤어 디자이너분들이 항상 “어우… 축북받은 머리숱이네요”라고 하시는 숱부자였다. 그래서 아침마다 머리 말리는 것도 일이고, 길이가 조금만 자라도 금방 무거워지는 탓에 자르러 온 것이지만……. 


숱이 이렇게 많은데 산후 탈모가 왔으니, 이제 어떻게 될까? 샤워가 끝나고 나서 한움쿰씩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며 항상 궁금해한다. 웬만큼 빠지는 게 아니라면 결국 숱이 이기게 되나? 아니면 어찌되었든 산후 탈모는 위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숱을 이기려나? 흥미진진한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그나저나 산후 탈모는 왜 오는 것일까? 정말 호르몬 영향만이 유일한 원인일지 의아해졌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머리 빠지겠다’고 하고, 육아는 충분히 머리 빠질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보다 요즘에는 수면교육이 가장 고민이다. 


만 2개월인 작은 사람의 하루는 단순하게 구성된다. 먹고, 놀다가, 잔다. 잠에서 깨면 다시 먹든가 아니면 논다. 일을 한다거나 넷플릭스를 본다거나, 아니면 책을 읽고 바깥을 산책하는 등의 활동이 전혀 없다. 그저 먹놀잠, 먹놀잠의 반복이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먹기-놀기-잠자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줬다. 너무 많이 놀면 지나치게 피로해져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을 잘 못 자면 피곤해서 밥을 먹다가 잠들어버렸다. 


이 시기에는 잘 자고 잘 먹어야 신체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아이가 잠을 잘 못 잘 때면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계속 울렸다. 잘 놀고 있더라도 곁눈질로 자꾸만 ‘지금인가? 지금이 재울 시간인가!’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피곤한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낮잠 입면이 망하기 일쑤였기에.




희한하게도, 아기는 잠들기 전에 꼭 울었다. 


타이밍을 잘 맞추면 몇 번 ‘으앙.’ 하고 잠들었지만 그런 경우는 윷놀이에서 ‘모’가 나올 확률보다도 드물었다. 보통은 ‘이러다가 또 강성울음으로 가겠군’ 싶을 정도로 울다가 운 좋게 잦아들거나 혹은 진짜 강성울음으로 넘어가서 몇 번 악을 쓰다가 눈이 스르르 감겼다. 


잠들기 전에 빽빽 우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아기는 작은 사람이 아니라 별개의 존재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소아과의 존재 이유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예컨대 아이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그냥 어른 먹는 약의 절반을 뚝 떼어주면 큰일나고, 어른과는 달리 아이는 소화기관도 미숙하고 잠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왜 아기는 항상 하드코어하게 잠이 들어야만 하는 걸까? 성인들은 울다가 잠들지 않는 것을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히 잠들텐데, 그렇다면 이런 입면은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어떤 유튜브 브이로그에서는 아이가 자기 범퍼침대 안에서 이리저리 걷다가 푹 쓰러지면서 잠들던데, 그렇다면 뚜벅뚜벅 걸을 나이가 되어서도 울음을 견뎌야 하려나? 




그러고 보니 ‘입면’이라는 말도 육아를 하면서 거의 처음 써봤다. 


참으로 육아를 하다 보면 전문 용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오전 낮잠은 ‘낮잠1’, 한낮의 낮잠은 ‘낮잠2’ 하는 식으로 부르기도 하고, ‘게우다’라는 표현도 하루에 몇 번이나 쓴다. 


육아는 ‘배워야 할 기술’이라더니, 용어부터 시작해서 이것은 또 하나의 전문 분야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만만하게 보고 접근했던 죄로 이제서야 호되게 매운 맛을 보고 있는 걸까?


육아가 기술이라면 낮잠 잘 재우는 기술을 터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잠만 잘 재워도 육아 난이도는 반의 반으로 줄어든다고 <삐뽀삐뽀 119 소아과> 하정훈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쯤 되니, 왜 사람들이 삐뽀삐뽀의 신봉자가 되는지 알 것 같다). 잠을 못 재우면 결국 안아서 재워야 하기에 집안일이고 뭐고 다 밀렸다. 




다행히 남편이 마지막 출산 휴가를 나와서 육아에 추가 투입된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수면교육은 남편이 시켜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도 삐뽀삐뽀에서였던가? 아무튼 요는, 남자들은 여자와는 달리 아기 울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혹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여성은 출산 직후에 모든 신경이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아기가 조금만 울어도 호닥닥 깨어나지만, 남성은 웬만큼 애가 찡얼거려도 쿨쿨 자므로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알아서 다시 잠든다는 말이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남편에게 ‘등 대고 재우기’ 수면교육을 부탁했기에 결이 좀 달랐다.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쓸 때는 관리사님이 하루종일 아이를 안고 재우셨지만, 현실적으로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필수적인 교육이었다. 


‘등 대고 재우기’를 하지 않으면 아이를 안고 어르면서 재웠다가 살포시 내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제 6kg에 육박하고 또 지속적으로 무거워질 아이를 매번 한참 안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아이가 성장하면서 감각기관도 발달하므로, 점차 예전과는 다르게 바닥에 등이 닿는 것을 잘 알아채기에 쉽게 깨버린다고 한다. 


다행히 남편은 아이를 정말 잘 재웠다. ‘등 대고 재우기’를 시작한 것이 불과 일주일을 겨우 넘겼는데, 이제 아이는 종종 머리만 쓰다듬어줘도 잘 자기도 했다. 물론 안 그럴 때가 훨씬 많은데다 그마저도 자다가 깨서 다시 재워야 할 때는 여전히 하드코어해서 안아 재우거나 해야 하지만, 그래도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나는 남편을 ‘영유아 수면 전문가’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노후에 할 일이 없으면 일당 20만원씩 받고 뛰어도 좋겠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남편이 없을 때는 내가 낮잠을 재워야 했는데, 뜻대로 아이가 쉽게 잠들지 못하면 그게 그렇게 암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이를 재우기는 해야 했다. 대체 아이에게 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될 대로 되라’ 식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알고 나서는 꼼짝 없었다. 


악을 쓰며 우는 아이를 안고서 잠을 재우려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피곤한 타이밍을 놓쳤나? 그래서 과피로로 잠을 설치는 걸까? 아니면 아직 더 놀고 싶은데 자라고 해서 눕기 싫다고 악을 쓰는 건가? 어쩌면 트림을 덜 해서? 기저귀인가? 


아닌데, 방금 트림도 시켜봤지만 하지 않았고 기저귀는 갈고 왔는걸. 대변을 보지 못해서 가스가 찼나?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수유를 하면 장 운동이 활발해지니까 이따가 밥 주면 비로소 해결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대로 악쓰기를 견디는 수밖에 없나.


그나저나 잠들 수는 있는 건가? 이러다 30분만 더 있으면 다음 수유텀이 오겠네. 그러면 밥을 줘야 하나? 아니면 낮잠이 부족하니 마저 재워야 하려나? 재우면 밥 시간이 밀리고, 밥 시간이 밀리면 다음 일정들이 주르륵 밀려서 결국 밤잠을 늦게 잘 텐데. 그런 게 반복되면 매일의 일과가 엉망이 될 테고, 아이에게 규칙적인 일과를 만들어주는 일은 물 건너가겠군…….




매일 하는 극강의 고민이 고작 아이의 낮잠 재우는 일이라니. 혹은 두 가지를 더하자면, 밥과 똥 정도?


전문가들이나 선배 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엄마 본인의 삶을 사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이가 좀 더 커서 여유가 생기면 그 때 생각해 보죠’라고 하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고. 


그 말을 떠올리면서 카페를 향해 걸었다. 아이는 낮 동안에 남편에게 잠시 맡겼다. 그런데 정말이지 ‘내 삶’이라는 게 뭘까? 나는 이전에도 글쓰기를 좋아했기에, 출산 후에는 육아를 하며 느낀 점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충분히 나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출산 전의 여유가 그리워지곤 했다. 어제 저녁에는 피자헛에서 마르게리따 피자를 포장해다 먹으면서 예전에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 갔던 일을 떠올렸다. 연휴를 앞두었다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해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이국의 뒷골목을 요리조리 걸어다닐 수 있던 시절이었다. 


샤워할 때면 히노끼 욕조나 노천 온천에 몸을 한동안 담그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 2개월짜리 아이를 데리고 뜨거운 물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 당분간은 그러기 힘들겠지. 물론 진짜진짜 의지를 발휘한다면 히노끼 욕조 옆에 트립트랩 의자를 두고서 아이를 눕혀둘 수도 있겠다. 




어제 저녁에도 아이를 재우려다가 지쳐버렸다. 


아무리 저녁이 일명 ‘마녀시간’이라고 해서 마구 울어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피곤하면 잠을 자게 되지 않나? 아이는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등을 대고 누운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악을 쓰며 울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들어올리고 어깨 위에 고개를 두게 해서 거실을 걸어다녔다. 그런데도 아이는 울었다. 그래서 가슴팍에 얼굴을 댈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주었더니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다.


시선을 내려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거실을 걸었다. 이미 늦은 저녁이라 바깥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부엌 조명이 거실을 노랗게 비추었다. 배경음악으로 틀어 둔 오르골 노래가 그제서야 들려왔다. 아이와 맞대고 있는 가슴에도 온기가 살살 느껴졌다. 


‘신생아 때처럼 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네…….’


신생아 시기가 지나면 점차 없어지는 ‘기분 좋을 때 짓는 표정’이라는데, 웬일로 아이는 입을 오므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산후조리원에서 보낸 날들이 떠올랐다. 조용한 방 안을 아이랑 단 둘이서 이렇게 천천히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아이도 활짝 웃었다. 아직 유치조차 나지 않은 밋밋한 잇몸, 작고 동글동글한 혓바닥, 빙그레 휘는 눈.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눈을 마주하고 보다가 동시에 미소를 지은 적이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서로 외국어를 쓰는 것 마냥 말도 통하지 않는데, 느낌만으로 이 작은 생명체와 감정이 공명한다는 게 가능한가?


눈물이 울컥 나서 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따금 사람들이 ‘육아는 정말 힘들지만, 아이가 주는 행복이란 게 있다’라고 하더니. 이게 바로 그런 걸까?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Nina Strehl


매거진의 이전글 무너지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