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도로 공부습관 만들기 위한 밀당 과정
숫자를 관심이 많던 첫 아이와 학습량을 조율하며 우여곡절 끝에 지금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아이가 네다섯 살 무렵 어린이집 등하원을 하며 나는 하나 둘 셋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퀴즈를 접목해 숫자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1부터 같은 숫자를 계속 더하는 놀이였는데 승부욕 강한 성향인 아이에게 이 과정은 도장 깨기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조그만 고사리 손끼리 더하다가 점점 암산을 하기 시작해 그 수를 키워갔다. 전날의 숫자들을 기억을 하더니 어느새 5천 억 더하기 5천 억은? 1조!라는 큰 단위까지 해내고야 말았다.
그 열정을 어떻게 연결 지어 볼까? 고민하다가 7살이 들어서는 겨울, 처음으로 제대로 된 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고력 수학 문제집을 샀고, 일주일에 한 번씩 사고력 공부방에서 선생님과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1시간 수업을 하고 남은 시간들은 엄마와 아이가 오롯이 숙제 할당량을 채워야 했지만. 아이는 예비 초등생이 된 뿌듯함과 함께 난이도가 쉬워 거뜬히 풀어냈다. '오호, 제법 해내는구나~' 이대로 꾸준히 하면 앞으로 진도 걱정은 없겠다는 안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진도가 나갈수록 난이도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숙제량을 채우기엔 아이도 나도 부담되었다. 처음 숫자에 흥미를 보였을 때가 '게임'의 방식이라면 지금은 훈련에 가까운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것이 아이에게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의 컨디션을 보고 공부방보다는 엄마표로 하루 정해진 양만 풀어갈 수 있게 조금은 느슨한 공부 스케줄을 가져갔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양을 늘려갔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인 영어와 수학은 매일 공부하는 습관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맞벌이로 늦은 저녁 시간 퇴근해서 저녁을 챙겨 먹고 자기 전까지 아이의 숙제를 봐주는 건 엄마인 나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루 정해진 양을 채우면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이 과정이 아이에게 적당한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게다가 매월 미션을 완주한 아이를 서점에 데려가 원하는 책을 선물하는 건, 어린이날 같은 이벤트라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매번 아이의 공부를 좋게 봐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서로 피곤한 상태에서 예민할 수밖에 없었고 아슬아슬하다 어떤 날엔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아이의 공부만 봐주는 것이 맞는 건가 느껴질 어느 날, 아이도 시그널을 보냈다. 며칠 미뤄두어 할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수학 문제집을 붙들고 쩔쩔맸다. "엄마, 이거 너무 많아요ㅠ" 엄마가 감량해 주기를 바라는 듯하면서도 그동안 눌러왔던 속상함을 토해냈다. "맨날 못해낸 사람이 되는 거 같아요."
곧잘 따라 하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매일의 작은 성공경험은 더 큰 도전으로 나아갈 힘이 되어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렇게 쌓인 좌절감이 스노우볼이 되어 아이의 다른 것들을 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기특하게 수학적 감각이 있다고 해도
매일 조금씩 꾸준히 유지하는 것과
즐겁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아이의 닭똥 같은 눈물 사이에서 서러움이 찬 눈동자를 봤다. 그래, 놀이처럼 공부할 수 있게 밸런스를 가져가는 게 중요하겠다. 나는 과감하게 아이에게 할당한 공부량을 줄이기로 했다. 그럼 월수금 영어 하고 화목은 수학 어때? 아이는 그래도 되냐는 표정과 함께 그 정도면 할 수 있겠다고 답했다. 마냥 신나는 표정에 아이를 보면서 잠재적인 재능이 발현될 기회를 오히려 누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깊은 반성을 했다.
어느 날 학교 돌봄 교실 담당 선생님이 연락을 주었다. 늦은 하교를 하는 아이가 돌봄 교실에서 충분히 학습지를 풀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니, 집에서 풀만한 문제집을 챙겨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엄마로서 그런 제안이 정말 감사하고 솔깃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아이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겠다고 답했다. 역시나 아이는 자기의 의견을 강하게 어필했다.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돌봄 교실에서 보내는 그 시간은 자유롭고 싶다고. 그 안에서 다양한 놀 거리를 찾는 재미가 좋단다. 너에게 충분히 그럴 시간을 줄 수 있다면 엄마도 좋아.
시간이 흐르고 며칠 전, 나는 건강검진 하느라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러다 거실에서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첫째 아이는 동생에게 "수학책 갖고 와봐! 형아가 설명해 줄게."라고 말하며 선생님이 되기를 자처했다.
"이거는 기차에 탄 동물들을 세는 거네. 여기 기차에 탄 동물은 몇 마리지?"
"9마리"
"여기는?"
"6마리"
"그럼 모두 몇마리겠어?"
"음 15?"
"맞아. 잘했어"
그러더니 금방 푸는데? 라며 동생을 칭찬했다. 한 장 더 하자! 는 제안에 동생은 신이 나는지 "그럼 3장 할래"라고 한 걸음 더 나갔다. 공부를 푸시하지 않으니 아이는 가르치는 재미도 스스로 찾아갔다. 틈나는 대로 놀이와 연관해 재미를 찾아갔다. 오롯이 자기 주도로 말이다.
아이라는 그 잠재력이 가득한 존재감을 관찰하는 것은 내가 가진 축복이다. 나의 미숙함에도 아이는 아이만의 길을 잘 찾아가 준다. 그렇게 관찰하는 엄마가 될게. 실은 아이의 학습량을 줄이면서 나는 러키비키*하게도 나의 학습시간을 확보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고 글감을 떠올려 글을 쓴다. 한편으론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공부하는 건 재미있는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아이 역시 나를 관찰하겠지?
우리 같이 계속 즐겁게 배우는 길을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