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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어린 로레인 Jul 21. 2021

우리 엄마 닮아갈 거리, 300km

우리 집에서 친정집과의 거리는 300km가 넘는다. 그래서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육아 관련 도움받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환경이었고, 아이가 생긴 후 집에 내려가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아이가 보챌 까봐 차로 가는 게 낫지만, SRT를 타면 더 빠르게 가기 때문에 매번 내려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도 참 고민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엄마아빠를 만나러 가는 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아이들도 내 마음처럼 따라 주면 좋을 텐데, 현실적으로 아이들이 300km가 넘는 장거리를 답답한 차 안에서 버티는 게 쉽지 않다. 아이들이 클수록 나아지려나 기대하면서 이번에도 차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 30분도 되지 않아서 아이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정말 재미없어! 가기 싫어! 거긴 하나도 재미있지 않아!”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느껴지는 대로 좋고 싫다는 말을 여과 없이 쏟아내곤 한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어린이집에 안 가는 추석 연휴 동안 우리 가족이 어떻게 보내게 될지 설명해 주니 신난다는 말을 연발했는데 휴.. 막상 집에 있는 장난감과 책을 마음껏 가지고 놀지 못한다 생각하니 할머니 댁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 것 같았다.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확확 변해버리는 아이의 맘을 꼭 받아주어야 하나? 어떻게 타일러야 할지 막막했다.


“창밖에 봐봐! 저 건물 되게 신기하다! 저기 2층 버스가 있네?” 등등 호기심을 돌려보는 회유 정책을 쓰거나 

“우리 휴게소에 가면 뭐 먹을까? 핫도그도 있고, 주스도 있고, 과자도 있고…” 기대치를 높이는 당근 정책을 쓰거나 

“많이 힘들지? 거의 다 왔어, 이렇게 잘 버텨내는 다섯 살 아이는 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야!”라고 치켜세워주고 토닥이는 칭찬을 더하거나 엄마로서 반응할 수 있는 갖은 방법을 쓰면서 노력하지만 속으로는 아이의 그런 말들에 몹시 서운함을 느꼈다. 운전대를 잡느라 아이의 눈을 보진 못했지만, 나는 아이에게 엄마의 진짜 속마음을 말해줬다.


“음, 그거 알아? 엄마는 지금 엄마의 엄마를 보러 가는 중이야~ 너는 매일 엄마를 볼 수 있지만, 엄마는 엄청 오랜만에 엄마 아빠를 보는 거잖아~ 얼마나 좋은 줄 알아?”


뜻밖의 말에 아이의 침묵이 이어졌다. 엄마의 감정을 이해하는 중이었을까? 예상보다 오래 장장 6시간이 걸려 도착한 후엔 아이에게 차에서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해줬다.


짧은 일정이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 아이는 문득문득 엄마의 엄마 아빠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수시로 미소와 애교를 발사하며 무뚝뚝한 딸인 엄마 몫 대신 효도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손을 꼭 잡으며 산책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내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었다. 나도 저렇게 아빠 손을 꼭 잡으면서 산책했을 텐데…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있고, 우리 아이는 다시 할아버지 손을 꼭 잡는구나.

치열한 워킹맘의 일상에서 이따금씩 긴장이 풀릴 때면 어김없이 컨디션이 급 저하된다. 엄마의 품에 있어야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 같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도 여전히 나는 지칠 때마다 가장 먼저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 여린 딸이다.


나는 아이들과 온전히 오프 된 시간을 보냈다. 일에서 손을 떼는 것뿐 아니라, 강박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조차 마음 편히 외면하며 오롯이 주어진 여유를 만끽하려고 노력했다. 삼시세끼 알찬 식탁을 차려주는 엄마의 정성에 감사히 밑반찬 하나하나까지 음미하려고 했다. 회, 병어구이, 삼겹살, 추어탕, 갈비탕, 짜장면, 순대, 떡볶이, 장어탕, 김치찌개, 갖은 종류의 나물들. 엄마 곁에서 살찌는 고민도 내려놓고 원 없이 먹고 쉬었다.


나도 엄마가 되어 살림을 꾸려보니, 며칠 머무는 동안 엄마의 살림 방식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도 워킹맘인데, 어쩜 이렇게 살림이 깔끔하지? 나와는 다른 엄마만이 고수하는 몇 가지 규칙을 보면, 놀라울 뿐이다.


1. 매 끼니 새로운 밥을 안친다
엄마는 매 끼니 새로운 밥을 지었다. 아침부터 밥솥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흰쌀 두 컵에 현미 잡곡 약간, 콩 한 줌. 그리고 더 부지런히 준비할 수 있다면 30분을 불려 더 맛있는 밥을 지으려고 한다. 나는 한 번에 많은 양의 밥을 짓고 바로 반찬통에 소분해서 급랭시켜 둔다. 그리고 매 끼니 해동 밥으로 식사를 차린다. 쌀을 씻고 밥솥에 안치는 30-40분의 시간을 아끼기 위한 꼼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뜨뜻한 밥 한 그릇이 몸과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워주니 그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매 끼니 밥을 지어야 할 거 같다.


2. 설거지통에 쌓아놓지 않고 바로 설거지한다.
엄마의 설거지통은 왜 항상 깨끗할까? 바쁘다는 정당한 이유로 매번 설거지통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몰아서 설거지를 하는 탓에, 더욱 설거지가 골칫거리, 기피대상이 되었다. 이사 가면 1순위로 식세기를 장만할 예정이다. 그러나 엄마는 식세기가 없이 매번 설거지를 휘리릭 끝마친다. 요리 중간에도 설거지를 겸하며 식사 준비를 하기 때문에 식사가 진행되기 전부터 설거지통은 깨끗하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통에 채워지는 즉시 물을 틀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급한 성격, 빠른 손놀림, 쌓아두면 금방 냄새나고 벌레가 생긴다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엄마의 근면 성실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같은 엄만데, 엄마는 참 위대하다.


3. 반찬을 꼭 소분해서 먹는다.
엄마는 항상 반찬을 소분해서 먹는다. 반찬통을 통으로 꺼내 먹는 간편함을 두고, 여러 가지 반찬을 한 접시에 골고루 소분하거나, 각 반찬 그릇을 하나하나 소분해 밥을 차리기도 한다. 그런 엄마가 차린 식탁은 항상 대접받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더 밥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인가? 맛있게 양념된 나물도 예쁘게 덜어진 모습을 보면 더 군침이 돌고 밥을 더 먹고 싶어 진다. 설거지 양이 많아지는 함정이 있지만, 엄마는 항상 반찬을 덜라고 한다.


4. 국을 꼭 끓여서 밥국 세트를 차린다.
아빠가 꼭 국을 같이 먹어야 하는 식습관을 갖고 계셔서 엄마는 결혼생활 37년이 넘게 매 끼니 국을 끓였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뭇국, 미역국, 장어탕, 김국 등 다양한 종류가 국그릇에 담길 때면, 그냥 편하게 먹으면 좋을 텐데 엄마가 고생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엄마는 항상 아침은 가볍게 빵으로 먹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드시지 않는 국을 가족들을 위해 차리는 엄마. 잠이 덜 깬 채로 차려진 식탁에 앉아 따뜻한 국물 한 숟갈을 뜨면, 목을 타고 몸에 흘러가면서 아침을 깨운다.   


5. 과일을 포크와 함께 내놓는다.
이제 참외가 맛있는 계절이 돌아왔다. 나의 최애 과일 중 하나인 참외. 간식으로 참외 하나 깎아 통으로 들고 베어 먹는 게 습관이 되어있는 나는, 엄마가 정성스럽게 깎아 한입 크기로 잘라놓은 참외를 보고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갈하게 놓인 포크까지. 엄마는 항상 과일을 포크와 내놓는다. 간편, 신속이라는 단어가 내 주방 라이프를 지배한 터라 참 소소한 것들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참외도 길게 하나씩 들고 먹으라고 아이들한테 주곤 했는데.


감탄이 나오는 엄마의 살림 방식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나는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새겼다. 막상 설거지통이 깨끗하게 유지하기 쉽지 않은데,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인식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실천해 보려 한다. 엄마 품에서 쉴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내 아이들에게 그런 품이 되어주고 싶으니까.


엄마 집에서 보낸 4박 5일이 지나 벌써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에 살짝 눈물이 고이려고 할 때, 둘째는 엄마 대신 환한 미소로 할머니한테 씩씩하게 빠빠이라고 인사를 건네고 귀요미 손으로 하트를 발사한다. 아이 덕분에 밝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서 참 고마웠다. 아이에게 이번 기회에 알려주었다. 엄마도 엄마(할머니)의 딸이라는 것을, 엄마도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아이가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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