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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nhyuk Sep 01. 2021

목공 배우러 왔는데요

"기초반에 등록하고 싶은데요"

"네 언제부터 나오시겠어요?"

"오늘 바로 가도 될까요?"



 결국 시작하고 말았다. 드넓은 직업의 바다를 표류하다 저 멀리 꽤 괜찮아 보이는 섬을 하나 발견한 기분이었다. 무슨 섬인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노를 젓기 시작했다. 


 나는 매사에 신중하고 계획적인 편이었지만 인생의 분기점이 될만한 중요한 결정엔 오히려 충동적일 때가 많았다. 수능 후 대학 원서를 내던 날, 행정학과가 뭘 배우는 곳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생각 없이 클릭해 원서 접수를 했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사실은 흔히 문사철이라 불리는 국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중 한 곳을 지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사철은 네가 혼자 책 읽으며 공부하면 되고, 학과는 다른 과를 지원했으면 좋겠다'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합리적이어서 생각을 바꿨다. 한창 문사철 전공하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 때였으니까. 문사철이 아니라면 굳이 고민할 필요 없겠는데? 싶었고 '에이, 그럼 아무 과나 가면 되지. 가서 내가 잘하면 되는 거잖아?'라고 눙치며 수능 점수에 맞는 과 중 행정학과를 골랐다.

 군대에 갈 때는 해군을 지원했다. 육군은 월마다 입대자를 추첨했는데 몇 달을 내리 떨어졌고 더 이상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입대를 빨리 하기 위해 해군에 충동적으로 지원했는데 해군은 해병대 비슷한 무엇인 줄 알았다. 훈련소에 들어가서야 '어? 배를 탄다고? 이게 아닌데?'라고 당황해 버렸다. 그 결과 동해 바다 구경을 11개월이나 할 수 있어다. 


 목공방에 등록한 것도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두어 달 정도 되는 방학 기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배워보기로 마음먹은 상황. 하지만 쉽사리 결정하지 못한 채 고민만 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버린 상태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티브이에서 가구 공방의 모습을 보았다. 공방을 운영한다는 것이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가구 공방을 창업하기 위해 어디서 무얼 배워야 하는지, 수익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수입은 괜찮은지 한참을 조사해 봤겠지만 이땐 더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취미반에 등록해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 확인한 뒤 고민은 나중에 해보자는 생각으로 공방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부터 바로 배우러 가겠노라 말씀드렸다.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남양주로 향했다. 경춘선 창밖으론 노을이 졌다. 열차 안이 노란빛으로 가득 찼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설렘으로 가슴이 꽉 찼다. 금곡역에서 공방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 발걸음이 가벼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공방 문을 열었다. 기분 좋은 나무향이 나를 감쌌다.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나무향. 나중에 알게 된 것이었지만 그 향은 레드파인 (소나무)과 삼나무 향이었다. 

 이내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벽엔 공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걸려 있었고 도마, 필통, 컵 코스터 같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물함도 있었는데 거긴 회원들의 목공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나무 책상, 나무 의자, 나무 벽, 나무 시계. 모든 게 나무로 만들어진 신기한 세상이었다. 그 세상 한가운데 젊은 남자 한 분이 책상 위에 있는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으로 그린 도면이었던 것 같다. 두리번거리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오늘 목공 배우러 왔는데요." 


주뼛거리던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방장님 식사하러 가셨어요" 


그러곤 다시 고개를 숙여 자기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나?'하고 기분이 나빠졌을 만도 한 태도였다. 하지만 공방에 대한 환상에 쓰여 있었는지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들어오든 내 작업에만 집중하고 몰두하겠다는 의지가 보여 멋있게 느껴졌다.


 잠시 공방을 구경하며 기다리자 공방장님이 나타났다. 인사를 나눈 뒤 첫 수업을 시작했다.


 먼저 기본적인 공구의 역할을 배우고 공방 이용 규칙, 간단한 이론을 배웠다. 그리고 바로 실습. 처음은 선 긋기였다. 기다란 나무 부재에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긋고 직각자로 선을 복사해 그었다. 오랜만에 잡는 연필이라 그런지 선이 삐뚤빼뚤했다. 선을 다 그은 후엔 톱질을 시작. 만만하게 봤지만 그려놓은 선을 따라 똑바로 톱질하는 게 쉽지 않았다. 자꾸만 톱 길이 어긋났다. 빗나간 톱 길을 바로잡기 위해 팔에 힘을 더 주었는데 아무리 힘을 잔뜩 줘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니 톱은 드르륵드르륵 걸리고 톱날이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도 난리를 치며 자르니 공방 회원들이 나를 슬쩍슬쩍 쳐다보곤 했다. 공방장님은 내게 힘을 빼고 해야 톱질이 잘 된다며 시범을 보이셨다. 

 땀을 뻘뻘 흘리며 톱질을 끝내고 나니 여러 개의 나무토막이 생겼다. 잠시 쉬며 커피를 마시고 드릴 프레스라는 기계의 사용법을 배웠다. 나무에 동그란 구멍을 뚫는 기계인데 톱질보다는 훨씬 쉬웠다. 그냥 나무를 잘 잡고 레버를 내려주면 구멍이 뚫렸다. 여섯 개의 나무토막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끈을 넣어 묶었다. "이게 뭐예요?"하고 물으니 공방장님이 대답했다. "캠핑용 냄비 받침이에요."


 끈에 매달아 가볍게 들고 다니다가 바닥에 펼쳐 놓으면 간단한 냄비받침이 되는 원리였다. 냄비 받침. 내가 나무로 만든 첫 번째 물건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별 것 아닌 조그만 물건이었지만 혼자 뿌듯해져서 신나게 전철역으로 돌아왔다. 늦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 땀을 식혀줬다. 열차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자 갑자기 다리 통증과 허기가 몰려왔다. 세 시간 동안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목공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재미있었어. 앞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아. 만약 직업이 되지 못하더라도 취미로 계속하고 싶을 것 같은데?'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치킨을 주문했다. 영화를 보며 후라이드 한 마리와 생맥주를 먹었고 깊게 잠들었다. 기분 좋은 잠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쓴 탓에 여기저기 근육통이 오고 말았다. 이게 내 목공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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