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길 2. 조천 선흘곶동백동산
제주의 동쪽,
조천읍 선흘리에 숨어있는 동백동산.
우리의 집 이층집에서 가까운 "선흘곶동백동산을 가보자!"
숲과 습지, 역사의 숨결까지 어우러진 이곳을 탐험해 보자.
발음이 참 아름다운 선흘리는 '습지를 품은 마을'이라고 한다.
제주도에 람사르 습지라니!
동백동산은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한 바퀴 돌 수 있는 평탄한 코스이다.
그런데 나는 꽤 힘들었다. (왜 힘들지?) 아마도 가다 보면 중간에 시멘트길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라고 핑계를 대본다. 나의 저질체력 때문이지만)
평탄한 숲길로,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지 않은 부드러운 숲길이라 걷기 참 좋은 길이다.
동백동산 혹은 동백동산습지센터를 내비에 찍고 가면, 넓고 쾌적한 주차장이 나온다. 이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면 동백동산습지센터 건물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주차를 하고 그쪽으로 걸어가면 친절하신 해설사님을 만날 수 있다. 동백동산 탐험전, 이곳에서 해설사님의 간단한 설명을 듣는 것이 좋다. 홈페이지 공지사항에도, 출발 전 코스 안내를 꼭 받으라고 권하고 있다.
해설사님은 곶이 '깊은 숲'을 뜻한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간단하게 코스를 설명해 주시며 ,
우리를 탐험의 문으로 안내해 주신다.
동백동산 홈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약 1만 년 전 형성된 용암대지 위에 뿌리내린 숲, 곶자왈.
‘곶’은 수풀을 의미하는 제주말이고 ‘자왈’이라는 말은 얼기설기 엉성한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지형 위에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있는 곶을 의미합니다.
곶과 자왈이 합쳐진 곶자왈은, 엉성한 돌무더기 지형에 나무와 덩굴 등으로 이루어진 숲을 의미합니다.
동백동산은 선흘리에 있는 곶자왈이다.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공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탐방안내도에 나와있듯
화살표방향으로,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동백동산 시작점에 가면, 풍경과 느낌이 달라진다.
해설사님이 설명하시던 그곳은
햇빛이 가득하고, 시야가 트인 넓은 마당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동백동산 입구를 한걸음만 지나면,
나무들이 빽빽하게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마치, 숲 속이 만든 경계,
나무가 만들어낸 커다란 대문을 지나는 기분이다.
그 자연의 문턱을 넘어가면,
신비하고 묘한 기운이 감도는 숲길이 시작된다.
"자 이제부터 탐험을 시작해!"
숲이 나를 초대하는 듯하다
습지라는 동백동산은 육지에선 보기 힘든 묘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처럼 느껴졌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빽빽한 나무 숲, 그리고 약간은 질퍽한 숲길.
군데군데 오돌토돌 놓인 돌들까지.
길이 넓은 오솔길이라기보단,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숲 속길 트레킹에 더 가까웠다.
숲길을 걷다 보면, 곳곳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경고 표시가 붙은 곳들이 있었다.
실제로 들어가면, 진짜 큰일 날 것 같았다.
나뭇잎에 쌓인 습지라니. 발을 잘못 디디면 그곳으로 빠져버릴 것 같았다.
사실 이곳을 예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동백동산'이라기에 동백꽃도 볼 겸 겨울에 찾아왔었다. 그런데 오래가지는 못하고 얼마 못 가 되돌아 나왔다. 비 온 다음날이었는지, 눈 온 뒤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땅이 질퍽했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많았다. 신발과 바지 끝은 이미 흙도 얼룩덜룩 묻고. 그래서 몇 걸음 만에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날 좋은 날, 다시 오자고 말하며.
그리고 이번엔 가을. 다시 찾은 길은 훨씬 걷기 좋았다.
옷이 젖거나 신발이 망가질 걱정은 없었다.
숲길을 따라가 가다 보면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들굴'이라는 굴을 만나게 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평범한 땅 구멍, 돌무더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땅 아래엔, 숨죽여 흐르는 슬픈 역사가 있다. 이곳은 4·3 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이 몸을 숨기던 은신처였고, 동시에 학살이 벌어진 처참한 현장이었다.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에 의하면 "1948년 11월 25일 피신해 있던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반못에 물을 길어 나갔다가 수색대에 발각이 되면서 토들굴에 피신해 있던 마을주민 25명 중 18명이 현장에서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라고 한다.
위에서 보면 한낱 작은 구멍일 뿐이지만,
그 속 깊이 새겨진 고통과 공포는 그 어떤 말로도 다 담아낼 수가 없다.
지금은 굴 입구 위로 철조망이 덮여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날의 숨결은 여전히 땅속 어딘가에서 쉬고 있다.
사실, 동쪽 조천은 4·3의 아픔이 곳곳에 서려있다.
지나가다 보면 너븐숭이 4.3 기념관도 볼 수 있고, 북촌 4.3길도 볼 수 있다.
조촌읍의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인 북촌마을은 4.3 사건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하나로,
현기영 님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곳, 조천읍 선흘리 숲도
그 아픔에 가까이 있었다.
단순히 자연을 탐험하듯 걷던 이 숲에서
역사의 아픔이
빗장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돌무더기 틈 사이에서.
그리고 나는 다시 신비한 자연의 길을 따라 탐험하듯 걸었다.
아픈 역사를 가만히 가슴속에 품은 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숲을 따라 더 걷는 중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곳엔 우리 가족 넷뿐인데!
"얼른 핸드폰! 사진! 사진!!!"
나는 가방 핸드폰을 허둥지둥 꺼내 들었다. 노루의 찰나를 붙잡고 싶었지만, 내 느린 손은 이미 숲 속으로 스며드는 노루의 뒷모습만 간신히 담아냈다. 그러나 이미 하얗고 뽀얀 무언가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 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노루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혹시라도 잊을까, 나는 사진 속에 표시를 남겼다.
하얗고 뽀얀 노루궁둥이였다!
숲에는 우리 가족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실, 노루도. 개구리도. 맹꽁이도. 이름 모를 새들도.
이 숲에는 이미 살고 있는 주인들이 참 많았다.
사람보다 먼저, 사람보다 오래.
숲의 많은 주인들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숲길을 따라 한참 더 걸었을 즈음, 넓고 고요한 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먼물깍'이라는 저수지였다.
처음엔 물을 담아놓은 저수지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동백동산의 대표습지였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이라는 뜻으로 ‘먼물’과 끄트머리를 이르는 제주어 ‘깍’이 합쳐진 이름으로 ‘먼 곳 끄트머리에 있는 물’이라는 뜻의 이름이라고 한다.
"먼물깍".
참 독특하고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사실 이쯤에서 한번 쉬어주면 좋다. 이곳엔 쉴만한 공간도 있다.
우린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가져온 물을 마시며, 시원한 습지를 눈에 담았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 가득한 이 돌 섬. 제주에,
이토록 촉촉하고 푸른 습지가 있다니!
마치 낯설고 이상한 나라에
불쑥 떨어진 기분이었다.
동백동산은 나무에 붙은 번호를 따라 걷는 즐거움이 있다.
길을 잃지 않은 위한 것인지, 몇 미터 간격으로 나무마다 번호가 붙어있다.
숫자를 읽을 줄 아는 동생과, 나는
그 번호를 따라 게임을 하듯 걸었다.
"1번, 2번, 여깄다 3번...."
한참을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그런데 36번은 어디 있지?"
36번을 겨우 찾았다. 36번에 다다르고 이어 37번을 찾는다.
37번부터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40번을 지나자 슬며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 41번!! 41번 어딨숴!! 언제 끝나!!!"
나무의 숫자는 52번이 되어야 탐험이 끝이 난다. (그런데 끝이 52번이 아니라, 주차장으로 다시 가려면 1번으로 돌아가야 하니 조금 더 걸어야 한다. 52번에서 1번까지는 쪼끔 더 가야 한다.)
36번을 바로 찾지 못하고 놓쳤던 이유는, 35번까지 가면 자연스럽게 숲길이 끝나고, 시멘트로 포장된 동네길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길은 외길이고, 이정표가 있긴 하지만, 우린 잠시 길을 헤맸다. 이때 의심하지 말고 정수장지나 쭉 직진할 것. 그러면 어느새 숲길이 다시 나타나고 37번 나무가 시작된다.
동백동산은,
온전히 숲길로만 이루어진 길은 아니다.
한 바퀴 돌다 보면 만나는 서쪽 입구 쪽엔 숲길이 잠깐 끊기고 시멘트 포장길을 잠시 따라 걷게 된다.
그곳엔 카페도 있고 집들도 있다.
숲과, 생활이 만나는 곳.
자연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아마 마을 근처에 이렇게 깊은 숲이 있기에
'토들굴'같은 굴도 있었을 것이고,
역사의 아픔도 자연에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작되는 숲길이 시작되고 따라서 걷다 보면,
어느새 1번 나무.
다시 시작점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나무가 만들어낸 문을 통해 넓은 곳으로 나오면
탐험이 끝이 난다.
동백동산은,
숲을 탐험하듯 시작한 길이었지만,
숲과 습지, 그리고 역사와 삶의 흔적까지 얽혀있는 곳이었다.
한걸음한걸음 걸으며,
자연의 신비를 탐험하고,
잊히지 말아야 할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