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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쉬멍] 동생의 일기

오늘도, 일기.

by 조현

<오늘도, 일기!>

발달장애가 있는 내 동생, 조율.

우당탕탕,

오늘도 일기를 쓴다.



2024년 10월. 제주도에 처음 간 날,

그날, 율이는 생애 첫 일기를 썼다.


동생은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많~이 틀리긴 하지만!)

글자를 읽고 쓰긴 해도,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마치 히라가나만 외운 내가 일본어를 읽고 쓸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모르는 것처럼.


그래도 동생은 어떤 단어와 문장이 자기가 원하는 내용일 때는 그 의미를 알아본다.


예전에 동생과 식당에 간 적이 있다.
부산에서 돼지국밥집이었는데, 동생은 입에 맞지 않은지, 돼지국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라면을 달라고 떼쓰기 시작했다.
"라면이 없는데~? 왜 그러지?" 싶었는데, 동생은 벽을 가리켰다.
<밥 모자라면, 더 있습니다.>
동생은 '모자라면'을 달라는 것이었다.

동생의 한글 실력은 이 정도이다.



그래도, 일기 한 번 써보자!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

나는 동생과 단둘이 예쁜 소품점에 들러 후다닥, 어여쁜 연습장을 하나 사 왔다.

처음엔 그림일기를 써볼까 싶어 줄이 없고, 얇은 연습장을 골랐다.

동생과 함께 가게에서 물건사기란 쉽지 않은데,

(고르는 시간도 기다려 주지 않고, 가게의 다른 물건에 손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다행히, 연습장은 어떻게 무난하게 사고 나왔다.

첫눈에 반한 연습장은 너무 제주스러운 귀여운 표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생도 마음에 쏙 든 눈치였다.

표지가 너무 어여쁜데, 사진을 올려도 되나 모르겠다.

(물론 저작권을 열심히 표기해서 올릴게요. 예쁜 일기장을 자랑하고 싶어서요~ 혹시 문제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20251002_130017.jpg

동생은 책만 보면, 아니 종이만 보면 낙서를 한다.

의미 없는 선을 긋고, 연필을 튕기고, 문지르고, 논다.

일기장도 처음엔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몇 장에는 아직 낙서가 남겨있다.


처음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일기'가 무엇인지 알까?

이걸 쓰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늘 한 일 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동생인데.

과연 일기를 쓸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동생이 못쓰면 내가 쓰지! 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20250913_154945.jpg 첫 일기

첫 일기.

동생의 글씨 위에 낙서가 살짝 덧대져 있었다. 그래도 다른 낙서들만큼 심하게 낙서하지는 않았다.

처음엔 크레파스로 써보았는데, 자꾸 손에 묻어서 연필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으로는 잘 표현하지 못하기에, 그림일기도 포기했다.

일기 속 집이 동생이 집을 그릴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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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낙서를 하고, 놀았다.

우려했던 대로 동생은 '일기'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나와 함께 일기 쓰기를 같이 한다.

매번 일기를 쓰기 전, 나는 동생에게 묻는다.

"조율! 오늘 뭐 했어?"

"오늘 뭐 먹었지?"

"율아! 오늘 어디 갔었지?"

그런데 동생은 항상,

하고 싶은 것, 한 것, 먹고 싶은 것, 어제 먹은 것, 오늘 먹은 것을 마구 섞어서 말하곤 한다.

그래도 비교적 확실하게 대답하는 건 '오늘 먹은 것'이었다.

자연스레, 동생의 일기는 먹방일지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기를 보면 항상, 메뉴가 쓰여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생은 '일기'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내가 함께 쓰지 않으면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남아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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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내용과는 달리,

최근엔 탕수육을 먹은 적도, 찜닭을 먹은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먹고 싶은 걸 쓴 게 아닐까 싶다.

언제는, 어제 쓴 내용을 그대로 따라 쓰기도 했다.


동생은 아무 페이지에나, 아무 곳에나

아무런 단어들을 써두곤 했다.

첫 페이지 다음엔, 그다음 페이지, 그리고 차례차례 써 내려가는,

그런 보편적인 순서를. 동생은 아직 몰랐다.

"율아~ 일기 쓰게 가져와!"라고 하면 동생은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그렇게 오늘 뭐 했는지, 뭐 먹었는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내가 불러주는 대로 글자를 따라 썼다.


동생은, 나와 일기를 쓰고 나면, 꼭 아빠께 가서 큰 소리로 읽는다.

아빠는 동생옆에 앉아 함께, 일기를 읽는 시간을 갖는다.


아빠가 가끔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이게 현이, 네가 쓰는 일기지. 율이가 쓴 일기니?"

... 어쨌든. 뭐.

쓰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동생의 연필을 쥔 손을 같이 잡고

내용을 불러준다.

그리곤 한 글자,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내가 불러주고, 손으로 연필 잡은 손을 같이 잡아주고 한 글자, 한 글자 썼다.

그러면 이런 말이 되는 일기를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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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해안을 갔던 날의 일기이다. '신기한'과 같은 표현을 동생은 하지 못한다.


사실은.

동생의 손을 빌린 나의 일기일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 육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일기는 계속되었다.

표지가 바뀌긴 했어도.


전에도 말했듯, '관성'처럼.

동생은 했던 행동을 계속한다.

일기 쓰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도 저녁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동생은 일기를 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율이와 난, 훨씬 많은 내용을, 훨씬 자세히 써 내려간다.

물론, 내용이 자꾸 반복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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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먹은 것도 꽤나 구체적으로 쓴다.

가끔은 그 안에 들어있는 재료까지 적을 수 있다.


며칠 전, 엄마와 내가 외할아버지를 뵈러 서울에 간 사이.

아빠와 단둘이 있던 동생이, 일기를 혼자 썼다.

아마도 내가 없어서, 혼자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평소엔 나를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쓰고, 다 쓰면 아빠께 가서 큰 소리로 읽어주는데,

어쩐지 혼자 스스로 썼다.

그날은 내가 없었고,

아빠는 '같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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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은 아니었고, (아직 명확하게 쓰진 못한다. 아직은 뒤죽박죽이다.) 집에서 한일들인데.

쓴 대로 실제 곰탕을 먹었고, 계란을 먹었고, 과자를 먹었다.

그리고 자유시간을 먹었다.

(일기 속 '자우시칸'이, 아마도 초코바 '자유시간' 인가보다.)

다 맞았다.

진짜로, 일기에 쓴 내용이 다 맞았다! (장소는 틀렸지만)


솔직히.

나는 너무 감동받았다.

동생이, 이젠 일기에 무얼 써야 하는지 (비록, '먹은 것만' 쓰더라도)

'오늘' 있었던 일을 쓰는 것.

'일기'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서.



그리고,

동생은 더 이상 일기장에 낙서하지 않는다.

이젠,

첫 페이지, 그다음 페이지, 차례차례 넘겨가며 쓰는

그런 '보편적인 방법'도 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어제 썼던 페이지의 '다음 페이지'를 스스로 펼쳐 들고 앉는다.


그리고

나를 부른다.

"누나! 일기!"


그래

일기 쓰자!


오늘도 하루만큼 성장한 이야기를.

동생의 일기 표지.jpg

<사진은 동생이 쓴 일기장 첫 장. 표지다.

X자는 본인 사인이다. (조율~ 사인해 봐! 하면 이렇게 엑스자를 그린다. 이유는 모른다.)

이모가 선물로 사주신 포토프린터를 이용하여 사진을 첨부하기도 한다. 평소 좋아한 것들을 프린트해 일기의 첫 장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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