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길 3. 한라생태숲, 숫모르편백숲길
나는,
한라생태숲에서,
한 발자국씩, 발걸음마다 진한 가을을 보았다.
11월 초.
엄마가 산책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검색해 보시다가 찾은 곳이었다.
제주도에서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머무는 동안 다녀간 장소들 중에서
가을의 정취를 가장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곳.
한라생태숲은 두 종류의 사람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곳이다.
→ 이런 사람이라면 한라생태숲 내부만 산책해도 충분하다. 잘 포장된 생태숲 내부만 천천히 돌아도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 이런 사람이라면 한라생태숲에서 연결되는 숫모르편백숲길을 향해 출발할 것. 이 길은 절물휴양림까지 이어지며, 한라산둘레길 9코스에 해당한다. 길이는 약 5.5km로, 가벼운 트레킹을 즐기기에 알맞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가족은 산책과 트레킹 사이, 그 중간쯤이었다.
그래서 숫모르편백숲길 쪽으로 조금 걸어갔다가 되돌아와, 한라생태숲 내부도 함께 둘러보았다.
편백숲까지 제대로 보려면 조금 더 일찍 도착해야 했다. 우리 가족은 도착 시간이 늦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의 느린 걸음으로는 편백숲의 맛만 살짝 보고 돌아오는 데에도 산길을 따라 2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한라생태숲에 도착하여 주차를 마친 뒤,
산책을 시작하기 전, 꼭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주차장 안쪽 끝에 있는 전망대.
이곳에 서면 탁 트인 시야로 한라산을 정면에서 마주 할 수 있다.
한라생태숲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라산.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구름 까지도 완벽한 가을 날씨였다.
이 풍경을 그냥 지나치긴 아까웠다.
자칫 놓치기 쉬운 위치에 있는데, 꼭 들러야만 한다.
한라 생태숲에 도착하여, 전망대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한라생태숲으로 들어섰다.
길을 잘 모르니, 혹시 지도가 있을까 싶어, 사무실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입구에는 한라생태숲탐방안내소가 있었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우리보다 먼저 다급한 발걸음으로 사무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직원분께 다짜고짜 물으셨다.
"편백숲! 편백숲 어디로 가요? 이쪽? 저쪽?"
지도를 들고 나오신 직원 분은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앞에 가셔서 오른쪽 가시면, 숫모르편백숲길 이정표가 있을 거예요. 그 이정표보고 쭉 따라가시면 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주머니는 성큼성큼 그 방향으로 떠나셨다.
우리도 얼른 직원분께 다가가 지도를 받고, 설명을 마저 들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숫모르편백숲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왔었다. 그저 '한라생태숲이 산책하기 좋다더라'는 얘기만 듣고 온 건데. 덕분에 편백숲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경사로도 심하지 않고, 편하게 두 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면 편백숲까지 갔다 올 수 있을 거예요! 길이 좋습니다. 한 번 가보세요."
직원분이 친절하게 덧붙여 설명해 주셨다.
그 말을 듣고 우리도 숫모르숲길 방향으로 향했다.
사진 속 안내에 이렇게 나와 있다.
숫모르숲길 :
한라 생태숲의 자연 그대로를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 숲길이다. 숫모르란 '숯을 구웠던 등성이' 란 뜻의 옛 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옛 숯 굽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숲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환상의 숲길이다. 숲길 2.4km 지점에 절물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숫모르편백숲길은 오름, 트래킹과 산림욕을 겸할 수 있다.
사진 속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본격적인 숲길이 나타난다.
숫모르숲길은 '많이 힘들지는 않다'고들 하지만,
막상 걸어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제법 있는 길이었다.
네이버 코스 정보에서도 "보통"난이도라고 했으니까.
우리가 간 날은 비가 내린 다음날이었다. 그래서 땅이 질퍽했고 곳곳에 물웅덩이도 있었다. 게다가 편백숲까지 갈 생각은 못하고 왔던 터라, 출발 시간도 늦었다. 숲은 다른 곳보다 저녁이 빨리 찾아온다. 11월의 숲은 4시 이전엔 내려와야만 한다. 한라생태숲내부도 봐야 하는데.
결국, 편백숲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절물휴양림과 갈라지는 분기점이 지나 거의 편백숲에 다다랐지만,
마지막 오르막을 앞에 두고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내 인생에,
이런 순간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이 오르막만 지나면, 조금만 더 가면..."
그 너머엔 분명 처음 마주할,
새롭고 낯선 편백숲이 펼쳐져 있을 텐데.
그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순간들.
혹은 돌아 설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
편백숲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일들이,
지금까지 내 삶엔 얼마나 많았을까?
그렇지만,
하지만,
난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왔던 길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어!
'한라산이 이렇겠구나!' 맛도 보고.
이 오솔길을 따라,
이 가을 햇살 속을
걸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오는 이 순간까지도
난 너무 좋았어.
후회는 없었다.
덕분에, 진~ 하고 깊은 가을을 한 껏 맛볼 수 있었으니까.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길.
우린 한라생태숲 내부를 조금 둘러보았다.
숫모르편백숲길이 완전한 숲, 산길에 가까웠다면,
한라생태숲은 걷기 좋은, 편안한 산책로였다.
어린아이들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잘 되어있었다.
그리고 꽤나 높은 고지에,
부담 없이 산책 겸 운동하기에도 좋았다.
다음에 다시 와서
한라생태숲만 천천히 걷는 날도,
혹은 숫모르편백숲길만 오롯이 걸어보는 날도.
있기를.
한라생태숲에는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가, 또 멀어지고 있었다.
낙엽도, 단풍도.
바람도, 공기도.
모두가 가을이었다.
우리가 숲에 들어서며, 직원분께 설명을 듣고, 지도를 받았던 탐방안내소로 돌아왔을 땐,
해는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처음 전망대에 도착해 한라산을 바라볼 땐, 한라산 꼭대기에서 빛나던 태양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은은한 빛만을 조용히 남겨두고 있었다.
마치, 가을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은은한 향기만 남기는 것처럼.
한라 생태숲,
그리고 숫모르편백숲길에서.
진하게 스며드는 가을의 깊은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 꼭 다시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