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은 내 작은 부엌으로부터
오전 내내 구르고 먹고 마심
서울에 사는데도 매일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참새가 제일 많고 까치도 있고 드문드문 부엉, 부엉, 하는 밤새도 섞여있다. 새소리를 들으며 깼다 하니 아침 일찍 일어난 줄로 알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새들은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지저귄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고 이불을 더듬어 전화기를 찾아 시각을 확인한다. 아무런 일과도 만들어 두지 않은 오늘. 조금은 이렇게 더 뭉그적거려도 좋겠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이불 밖은 위험해).
어젯밤에 샤워를 마치고 바른 보디로션 냄새가 은은하게 남았기에 코끝에 손목을 갖다 댄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썼던 보디로션에서는 익숙하고 아늑한 향이 난다. 아직은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이번엔 몸을 옆으로 돌리고 덮던 이불을 돌돌 말아 껴안으며 얼굴을 파묻는다. 뒤척일 때마다 이불에서 달달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 어제 아침에 세탁기에 넣고 돌린 이불 커버는 햇볕이 닿는 자리에 널고 잘 말려 보송보송하다. 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행복한 걸까?
양치로 잃어버린 입맛을 새로 돋워야지. 물컵을 내려놓고 냉장고 문을 연다. 입안에 아직 머물고 있는 민트향을 죽이려면 뭘 좀 씹어야 할 텐데. 오! 오이가 보인다. 물에 잘 씻어 감자칼로 드륵드륵 껍질을 벗긴다. 풋풋한 오이 향이 부엌에 퍼진다. 복숭아나 살구를 이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참외랑 바나나쯤은 너끈히 이기고도 남을 이 향긋함에 기분이 또 좋아진다. 껍질을 벗은 오이를 손에 쥐고 열십자 모양으로 칼을 두 번 집어넣는다. 길쭉해진 오이 막대기 네 개. 긴 면을 다시 삼 등분해서 컵에 꽂는다. 방으로 가져가면서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아삭아삭. 오이는 씹는 소리도 맛있다.
덮던 이불을 한쪽으로 아무렇게나 몰아놓고 그 위에 다시 눕는다. 아, 물론 오이를 씹으면서(사각사각).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ㅅ(시옷)'자 모앙으로 엎어뒀던 책을 펼쳐본다. 이런,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다시 덮어두기로 한다. 음악을 들어야지. '요즘 들은 음악과 비슷한'으로 묶은 음악이 있기에 주르륵 들어보기로 한다. 제법 괜찮은 몇 곡이 지나가고, 학생 때 즐겨 듣던 음악으로까지 이어진다. 와, 이 AI 천재구나! 까맣게 잊고 있던 옛 음악을 들으며 다시 스무 살이 되어본다. 오이로 치약 맛을 씻었으니 이제 커피를 마셔도 좋겠다. 일어난 김에 선물 받은 화분을 180도 돌려둔다. 모든 잎사귀에 해가 골고루 닿을 수 있도록.
며칠 전에 만들어 냉장고에서 숙성 중인 더치커피를 꺼낼까 하다 마음을 바꾸고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적당히 쏟아붓는다. 원두가 바스러지는 잠깐 동안에도 고소한 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이번에 산 콜롬비아 수프레모는 유독 아몬드 향이 짙다. 커피메이커가 후드득, 빗소리를 내며 아몬드 맛 커피를 내린다.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서 웹툰을 보며 커피가 조금 식기를 기다린다. 온도가 조금 낮아져야 향이 더 짙어진다. 삼키기 전에 입에 살짝 머금으면 단맛, 신맛, 고소한 맛, 쓴맛, 짠맛이 혀에 감겨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아, 맛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버섯 두 종류와 세 가지 색 파프리카와 양파를 손질한다. 때마침 보글보글 끓는 냄비에는 파스타면을 넣는다. 납작한 링귀네면을 삶는 동안, 잘 달군 펜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베이컨 세 줄과 마늘을 볶다가 손질해둔 채소를 넣어 함께 볶는다. 소금 톡톡, 후추 톡톡. 넉넉한 면수와 링귀네를 팬에 합체시킨다. 다시 소금과 후추를 추가한다. 채소 맛이 우러난 면수가 면에 잘 배도록 센 불에 볶는다. 접시에 옮겨 담고 다시 후추를 추가하면 오일 링귀네 완성! 간은 조금 싱겁고, 면보다 채소가 훨씬 많고, 마늘과 후추를 듬뿍 넣어 알싸하게 매운 파스타는 집에서만 먹을 수 있다. 나만큼 내가 좋아하는 맛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배가 불러서 뜨거워진 몸은 차가운 더치커피로 식혀야겠다. 음악도 몇 곡 더 듣고, 책도 마저 읽다가 참외도 깎아 먹을 거다. 집 밖에 나가기 어려우니 더 잘 먹고 덜 움직이는 몸은 무럭무럭 살을 찌운다. 내 작은 부엌이 쉬지 않고 소란스럽게 들썩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