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인어(A Mermaid), 1900>|
열려라, 참깨! 열려라, 물!
"슈트는 안 무거워요? 그거 비싸다고 말로만 들었는데!"
래시가드를 입으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오픈워터에 무지했던 나는, 겁쟁이답게 이런저런 질문을 잔뜩 늘어놨다.
"슈트 입으면 물에 동동 잘 뜨고 수온 낮을 때 체온 보호도 되니까 좋긴 함. 오픈워터 자주 나갈 거면 필수. 가격대는 다양해. 집에 네오프렌 재킷 S사이즈 있으니까 필요하면 입어 봐."
친절한 야옹 언니. 어림짐작하건대 그의 물밥은 아마 족히 12년은 넘었을 듯하다. 동호회 대화방에는 친절한 사람투성이다.
"오픈워터 경험 없는 분들 비경쟁 1km 도전하면서 불안해들 하시니 저도 같이 접수하겠습니다. 대회 진행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출발할 수 있으면 같이 돌아요."
수린이들의 걱정 어린 대화가 이어지자, 두목님이 답하셨다. 세상 따뜻하신 분!
스위스에는 아침에 강물을 타고 수영해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베른 사람들은 알레 강을, 바젤 사람들은 라인 강을 헤엄쳐 직장으로 간다. 물고기 모양의 방수팩(비켈피시, Wickelfisch)을 안전부이처럼 타고 유속을 느끼며 떠내려갈 수도 있다고. 신석기 이전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하던 조상 인류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수영장 아닌 곳에서 미역 감기를 꿈꾸는 것 역시 태곳적 인류의 DNA 그대로를 현현하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좁아터진 수영장에서 앞뒤 사람들과 부딪힐 일을 염려하며 제자리 헤엄을 반복하는 대신, 망망한 강과 바다를 헤엄쳐 가로지른다. 평균 키가 한낱 2m도 되지 않는, 날개도 물갈퀴도 없는 종족이 오픈워터(Open Water)를 시도하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순리일 것만 같다. 나는 이 종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열려라, 참깨!"
<천일야화>의 이야기 중 하나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주인공 알리바바는 보물이 감춰져 있는 동굴에 가서 이렇게 주문을 외친다. 영어로 하면, '오픈, 세서미(Open, sesame)!'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작은 소망을 담아 '오픈워터(Open Water)'를 주문처럼 외워보기로 한다.
"열려라, 물!"
물에 간신히 뜨지만 인류의 숙명에 순응해 보고 싶었다. 일단 두드리고, 생각은 나중에 하자! 길게 굽이치는 생의 길 어느 한 갈래로는 딱 알맞은 유속이 몸을 앞으로 밀어주는 물길이 활짝 열리길....
단 한 번의 결심으로 새 삶이 펼쳐진다면
"괜찮아요. 어떤 고통도 참겠어요."
뜨거운 통증을 참아야 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인어공주는 잔뜩 으름장을 놓는 마녀를 향해 굳은 결심을 드러낸다. 이로써 인어공주는 더 이상 인어도, 공주도 아닌 삶을 살게 된다. 앞으로 펼쳐질 육지에서의 삶은 막연하기만 하다. 나는 과연 어떤 소망 앞에서 어떤 고통도 참겠다며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퇴사를 앞두고, 단기간의 목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간신히 버티던 하루하루가 가까스로 마무리되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백수가 되면 이러저러한 고된 현실 탓에 수태기가 왔다는 변명도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예전처럼 500m, 그러니까 수영장 열 바퀴 정도는 다시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돌아보는 거다. 여차하면 스위스 사람들이 쓰는 비켈피시 같은, 물에 동동 뜨는 안전부이를 튜브처럼 붙잡고 파도를 타고 떠내려가다가 신나게 손을 흔들고 난생처음으로 구명보트를 타 보는 거지, 뭐, 게다가 공짜인걸! 별거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