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특별한 풍경
언제쯤이면 갑갑한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피렌체에 둥지를 튼 후 아내와 함께 자주 가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지난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짬 만나면 다녀오던 아르노 강(Fiume Arno) 가의 작은 공원. 관광객들로 차고 넘치는 시내 중심과 달리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걷는 코스는 가끔씩 달라진다. 시내 중심을 가로질러 일 뽄떼 베끼오(il Ponte Vecchio)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올라 동쪽 방향으로 이동한다. 중부 아펜니노(Appennino centrale) 산맥에서 발원한 아르노 강이 피렌체를 휘감고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또 두오모를 중심으로 약간 남동쪽에 위치한 바실리카 디 산타크로체(Basilica di Santa Croce di Firenze) 성당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아내가 혼자 외출에 나설 때면 주로 후자의 코스를 택하곤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아내에게는 그 길이 당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외출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그 코스는 진열장에 놓인 이탈리아산 유명 브랜드를 눈팅하는 장점 외에 목적지까지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것.
아내에게 해당하는 외출의 두 가지 목적은 매우 단순해 보이는 듯 까칠하다. 하나는 이탈리아어 숙지를 위한 단어와 숙어 외우기인데 낯선 외국어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 또 하나는 갑갑하게 만드는 갇힌 공간(집) 보다 탁 트인 공간이 더 좋은 것이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는 서울에 사는 동안 악천후를 제외하면 거의 매일 산행을 하며 몸을 다졌다.
이런 운동 덕분에 장기간 먼 나라 여행도 거뜬히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걷기를 통해 아르노 강가의 한 공원을 돌아오는 시간은 대략 2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자주 다니는 그 공원엔 무슨 특별한 풍경 혹은 이벤트가 있을까.. 아내가 혼자 외출에서 돌아오면 상기된 얼굴로 혹은 약간은 피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공원에.. "
"응, 어서 말해봐.."
"우리가 가던 공원 있잖아.. 거기 연초록이 얼마나 이쁜지 몰라.. 세상에!"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 말자 신발을 다 벗기도 전에 당신이 본 달라진 세상의 모습을 내게 전하는 데 생전 세상 구경을 못한 사람들처럼 좋아한다. 아내의 입을 빌려 바라본 '달라진 세상'은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도 너무 평범하다. 겨우내 잠시 움츠렸던 아르노 강변에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기 시작한 것. 이런 풍경은 대부분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받거나 소소한 것으로, 그냥 지나칠 뿐인데 아내에게 또 우리에게는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운 풍경인 것이다.
독자들께서 기억하고 계실는지 모르겠다. 브런치에 글을 끼적거리기 시작하면서 프롤로그 삼아 첫 장에 "나는 피렌체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피에솔레 언덕 위에서 몇 해 전의 일을 떠올리며 마치 꿈같은 일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땐 혼자였지만 지금은 아내가 내 곁에서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는 것.."이라 써 두었다.
그게 대략 5년 전의 일이었으므로 우리가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기 위해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럴까. 아내는 당신이 흘려보낸 귀한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생각이 꿀떡 같을 것. 피렌체에 머무는 하루하루가 더없이 소중할 뿐만 아니라, 여행을 좋아하는 당신의 또 다른 계획 속에는 이탈리아 혹은 유럽을 야금야금 통째로 삼켜볼 요량인 것이다.
그런 반면에 나는 5년 만에 처음으로 브런치를 통해 장문(?)의 글을 우리말로 써 보는 것. 낯설지만 너무 반가웠다. 그동안 주로 이곳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의 언어 습득 등으로 독한 마음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 오죽하면 나의 페북은 어수룩한 이탈리아어로 소통하며 도배되다시피 했을까.
형제들과 친구들의 오해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늘 미안하게 생각했다. 또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래도록 변치 않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고마운 분들. 또 페북의 친구들은 주로 이탈리아인들로 이방인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의 기질과 문화를 엿보기 위한 나의 복선이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브런치에 글을 끼적거린 페북의 겉면을 보면서 벌써부터 경계심을 보내는 걸 보면 낚싯밥으로 생각했을까. 그럴 리 없다. 나의 소박한 계획대로라면 머지않아 주로 나의 블로그를 잡기장 삼아 끼적거리던 칼럼과 여행기 등이 현지 언어로 변신하게 될 것 같다. 그때쯤이면 5년 동안 입 다물고 갇혀 지내던 내가 만든 '나 만의 감옥'으로부터 탈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겠지 아마도..
아내가 외출에서 돌아오면서 그토록 좋아하던 풍경은 피렌체의 사계였다. 산행을 통해 익숙해진 당신의 자연을 향한 시선은 남다르다. 일상에서 매일 대하는 풍경일지라도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사물은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것. 사계가 다르고 매월 매주 매일이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며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다.
특히 이맘때 피어나는 연둣빛 새순은 생기가 가득하여 보는 이를 절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이렇듯 우리의 삶이 따분하거나 힘들 때 거들떠보기도 싫었던 녀석들이, 안중에도 없었던 녀석들이.. 언제부터인가 어느 날 매우 특별한 존재로 보이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자연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며 행복해지는 현상 등 우리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곤 한다.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이런 명언 이상의 가르침은 나로부터 발현된 게 아니라, 내 속에 내재되어 있던 모습을 라틴 아메리카의 위대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뜨랄이 깨우쳐주게 된 것이다. 세상에 널린 사물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신이 당신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 것. 평범한 일상이 특별함 이상으로 다가오는 건 하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어떤 신을 따로 섬기지 않더라도 유사한 존재의 필요성을 권유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시내를 가로질러 일 뽄떼 베끼오에 당도했을 땐 아르노 강물이 황톳빛으로 변해있었다. 한 이틀 오락가락한 비가 상류로부터 이어지면서 아르노 강의 풍경이 달라진 것. 뿐만 아니라 뽀르따 산 니꼴로(Porta San Niccolo) 앞을 장식하고 있던 나무들은 일제히 잎을 내놓고 5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봄을 느끼는 순간 봄날은 저만치 사라지고 있었던 것. 4월의 뒷모습에는 아르노강이 베푼 향취가 코끝을 자극하며 어지럽힌다. 녀석들은 얼마 만의 외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