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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Jun 01. 2021

꽃을 좋아하지만 꽃무늬는 싫어요

다짐

 요 근래 이상하게 멍한 순간이 많아졌다. 그럴 땐 손에 칼을 들지 말아야 하는데, 끼니를 건너뛸 수 없었다. 마음은 안갯속을 걷고 있었는데, 정신을 들어보니 가장 잘 드는 고기 전용 칼에 손가락을 깊게 었다. 솟아나는 피를 막느라 등이 오싹해졌다. 내 손가락에서 장미잎처럼 붉은 피가 쏟아졌다. 3일이 지났지만 아직 손가락을 구부리지 못하고 있다. 손가락 하나가 문제인데 세수도 힘들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 부위에 통증은  사라지만 머릿속 뿌연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별자리 때문인가? 한 점성술사 칼럼에 내 별자리는 평소에 걱정병을 달고 산다던데 그 점성술사를 만나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난 아무 일도 없는 날에도 미래의 걱정을 데려와 고민을 한다.

  잠깐 집안일을 하다 보면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어딘가에 부딪쳐서 멍이 든 것처럼 걱정은 뻐근한 통증으로 남는다. 지난주엔 손에 닿는 것들이 깨지더니 이번엔 손에 피를 봤다.

내 손에서 장미 빛 처럼 붉은 피가 쏟아졌다

 뭔가 문제들이 내 주변을 감싸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 손 세수가 불편해서 그런지 얼굴에 먼지가 가득 묻은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남은 장미꽃을 보러 공원으로 나섰다.

 새벽에 내린 비가 마르지 않아 장미잎은 물을 머금은 채로 빛이 났다. 꽃을 만나니 꽃 세수를 한 듯 얼굴이 촉촉해졌다.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해놓고 길을 나섰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무와 장미 덩굴 사이로 걷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늘 불안과 걱정을 달고 사는 나에게 꽃은 딱 지금을 일깨운다. 꽃은 눈앞에서 피어 있지만, 상상으로 만들어진 상황은 허상일 뿐이다. 꽃을 보는 내 몸에 집중하면 불안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감정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아직 붕대를 감고 있지만 손가락 상처도 금방 다쳤을 때처럼 피가 흐르지 않는다. 지금도 몸은 스스로 아픈 곳을 치료하고 있다.  


  내 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쌓여있는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있다. 남긴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처분한 물건은 화려한 꽃무늬들이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 받은 것들인데,  꽃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땐 거절하지 못했다. 싫다고 말하면 날 싫어할까 봐였다. 사실 나는 꽃을 좋아하지만 꽃무늬는 좋아하지 않는다. 꽃을 만나러 가는 일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거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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