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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Oct 27. 2021

텃밭에서 키운 무가 아까워 못 먹겠어요

김장 무

종잡을 수 없던 여름과 달리 점잖아진 가을 날씨는 텃밭 풍경도 바꿔놓았다. 텃밭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상추잎이 커지면 잘라가며 먹었던 봄도 떠났고, 하지감자도 캐서 먹었고, 주렁주렁 달리는 고추를 따는 재미에 빠졌는데, 김장채소를 심은 텃밭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배추가 속이 차서 김장을 할 만해야 수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배추 옆에서 자라는 무도 밭을 덮을 만큼 무청이 굵고 푸짐해졌다.


모처럼 텃밭 풍경이 여유로웠다.

오늘따라 찾아오는 밭주인들도 없고, 혼자서 큰 농장을 가진 기분이었다. 텃밭에 물을 충분히 주고 나서도 나 혼자였다. 물 주기는 금방 끝나고 하는 할 일이 없었다.

 김장채소들은 통통하게 몸집을 키우느라 바쁜데, 정작 밭주인은 구경꾼처럼 한가해진 것이다. 배춧잎을 야금야금 갈아먹던 애벌레들도 안 보이고, 양손으로 배추를 잡아보니 단단한 느낌마저 들었다. 속을 보려고 손가락을 넣어봤지만, 속잎이 많아져 예전처럼 벌어지지 않으니 뿌듯해졌다. 요즘 마트에 파는 배추들을 보면 괜히 살피게 된다. 텃밭 배추가 얼마나 더 커야 파는

 김장 배추가 될지 상상하며 즐겁다. 다행스럽게도 텃밭에 크는 배추는 몇 포기나 될지 눈으로  세어 보며 머지않은 김장 날이 어른어른했다.


 산 능선에 거의 닿은 해를 등지고 밭고랑 사이에 앉았다. 마스크를 내리니 젖은 흙냄새와 싱싱한 채소들이 풍기는 향내가 좋았다. 커피 한 잔이나 달콤한 디저트도 없는데 몸이 편안해지고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난 이 시간이 참 좋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한 엄마이기 때문이다.

긴 지렁이가 언제 흙 위로 올라왔는지 신발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밭도랑을 쓱 지나는 지렁이를 몇 번이나 마주쳤을까. 텃밭에서 지렁이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것을 나도 알게 되었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많은데 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아이들과 북적거리며 웃을 때보다 잔소리가 더 많았던 것 같았다. 괜히 피곤하다고 짜증 내며 심술을 낸 건 아닌지 미안해졌다.


긴 지렁이가 언제 흙 위로 올라왔는지 신발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밭도랑을 쓱 지나는 지렁이를 몇 번이나 마주쳤을까. 텃밭에서 지렁이를 보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더 이상하다는 것을 나도 알게 되었다.  겪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많은데 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아이들과 북적거리며 웃을 때보다 잔소리가 더 많았던 것 같았다. 괜히 피곤하다고 짜증 내며 심술을 낸 건 아닌지 미안해졌다.


 하긴 김장 배추 키우는 일도 그러했다. 배추 모종을 심은 지 일주일 만에 노랗게 변해버린 잎을 어쩌지 못하고 모종을 다시 구해서 심어야 하나 심각했다. 조바심 내는 나를 다독인 것은 보란 듯이 건강하게 자란 배추 모종이었다.  노랗게 변했던 작은 잎이 자라 큰 배추가 되는 걸 보니, 속이 단단한 사람들도 그렇게 비, 바람, 가뭄, 해충 등을 직접 겪으면서 스스로 힘을 키워 낸 것 같았다. 침묵의 힘을 믿게 되니 아이들을 말로만 가르치려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닫게 되었다. 밖은 소란스럽지만, 속잎은 촘촘하게 자라서 단단해지는 배추처럼 나도 그렇게 단단해지는 중일 지도 모르겠다.


 초록빛 배추들이 나란히 앉은 텃밭 풍경을 뒤로하고 멀리 뒷산도 단풍 물든 나무들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작 달라진 건 나였는데 알아채지 못했나 보다.

텃밭을 시작할 때의 기대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다. 텃밭을 올 때마다 자연 그대로의 먹음직스러운 푸성귀도 얻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마음도 예전보다 유연해진 듯했다. 텃밭에 혼자 앉아 있으면 입은 꼭 다물고 있지만, 자연 속에서 떠드는 '마음 수다'는 매번 끝이 날 생각이 없다.


 지렁이가 사라진 곳 근처에 땅 위로 드러난 무가 먹음직스러웠다. 금방 뽑은 무 맛이 어떨지 궁금했다.  뻣뻣하게 깃을 세운 무청을 살피며 하나 정도는 뽑아가도 아직 수확할 무가 많이 남았구나 싶었다. 뽑아서 생채를 무쳐 먹으면 좋겠다 싶어, 그중에서도 가장 커 보이는 걸로 골랐다. 보기에는 무청이 통통하고 길었지만 땅속에 자라는 무가 얼마나 커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을 먹었으니, 작든 크든 하나 먹어봐야겠다 싶었다. 한 손으로 무청 줄기를 모아서 잡고, 땅 위로 올라온 무를 살짝 당겼다. 꿈쩍하지 않아서 좀 더 힘을 주었지만 쉽게 뽑히지 않았다. 주변에 흙을 조금씩 파내고 힘껏 당겼더니 흩어진 흙냄새가 물씬 나며 땅속에서 나왔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새하얀 무가 나왔다.


  

 텃밭에서 첫 번째 수확한 무를 가방에 넣었더니 제법 묵직했다. 오래된 이야기가 들리는 듯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쩍'하고 쪼개지더니 아싹 아싹 씹는 소리가 난다. 검게 그을린 아버지 입엔 새하얀 이가 반짝거리며 무를 씹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배처럼 시원하고 달다는 말에 속아서 나도 무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무를 입을 넣는 순간 따끔하게 혓바닥을 찌르는 것 같아 바로 빼냈지만, 할머니 방에서 먹었던 하얀 박하사탕처럼 입안이 맵고 달고 차가웠다. 생무를 처음 먹어 본 나이를 더듬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씻은 무를 보니, 그만 먹을 생각이 달아나버렸다. 집으로 오는 동안 정이 들었는지, 첫 수확이라 그런지 자꾸 아이의 얼굴을 보듯 들여다보게 했다. 무가 먹기 아까워서 인지,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 인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래로 축 처지는 무청을 머리카락처럼 하나로 묶어 올렸다. 큰 계량컵에 넣으니 딱 맞았다. 결국 무를 먹기 아까운 마음이 이겨서 저녁 메뉴로 무생채는 만들지 못했다. 대신 텃밭에서 키운 무는 꽃병에 꽂은 꽃처럼 집안을 향기롭게 해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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