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종료안내 문자가 왔다.김장배추와 무 수확을 언제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더는 미룰 수 없었다.며칠 뒤면 밭도 완전히 정리해야 했다.정든 텃밭에더는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부터 들었다.
1. 들깨와 고추 정리
들깨는 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줄기를 자르고 남은 뿌리를 뽑았다. 뿌리는 긴 수염처럼길고 덥수룩했고,생생히 살아있는 힘이 느껴졌다.흙을 털고 나니 가늘고 하얀 뿌리가 내 검은 머릿속에 숨어있는흰머리카락처럼 측은해 보였다. 그만 보내야 하는아쉬운 마음은 잘 여문 들깨를 털며 달래기로 했다.
나무가 되어버린 고추는 뿌리를 뽑아내기 어려웠다. 고추 모종을심던 날이 떠올랐다. 초록색 작은 잎이 달려 있던 모종은 심자마자지지대에 줄기를 묶어주어야 했다. 그런데지금은 단단한 나무로 자라서 줄기를 지지대로 쓸 만큼튼튼하기만 했다. 친구를 떠나보내듯 가장 오래 텃밭에 있던 고추와 들깻잎을 먼저 보내주었다.
그리고 착한 텃밭은 마지막 피날레가 기다리고 있었다.
2. 김장배추와 총각무, 무, 쪽파 수확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가장 늦게 배추와 무를 뽑으러 온 듯했다. 빈 밭이 대부분이었다.총각무, 쪽파, 무, 배추를 모두 한꺼번에 수확했다. 작정하고 갔지만 수확물은 밭에 펼쳐져 있을 때보다 더 어마어마했다.
무는 수시로 뽑아 먹어서 인지 5개 정도 남았다. 잘 자란 쪽파는 지난번 마트에서 사 온 한단을 그대로 들고 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배추를 뽑을 차례였다. 남편과 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했다. 배추 뿌리가 단단해서 칼로 잘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양손으로 배추를 들어 올리는데 볼링공을 들 듯 묵직함이 느껴졌다. 배추는 모두 13포기를 수확했는데, 김장을 제대로 할 만큼의 양이었다. 밭에서 들고 나와 싣는 일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수확물이 많으니 힘든 줄도 몰랐다.
3. 텃밭의 마지막 모습과 작별인사, 그리고 남은 것
쑥갓, 족파, 가을상추는 뿌리째 옮겨와 베란다 화분에 심었다
배추 겉잎을 밭 위에 올려두며, 다음 텃밭 주인이 누구인지 부러워졌다. 배춧잎을 하나도 남김없이 갖고 가고 싶었지만, 비바람에 벌레들의 습격도 견디느라 고생한 배추 겉잎은 남겨두어야 했다. 수확한 배추가 많았기에 뿌듯했고,끝까지 내 곁에서 함께 힘을 내준 듯 텃밭이 고마웠다.
내 이름이 걸려있던 텃밭은 이제 새 주인을 맞게 될 것이다. 수도꼭지가 가까워서 물 주기 쉬웠고, 양지바른 바깥쪽 밭이라 다니기도 수월했다. 그늘지지 않고 바람이 잘 들어서 인지 병충해도 덜했다.
다음 텃밭 주인이 누구인지 벌써 부러워졌다. 이상했다. 졸업하는 학교를 떠나듯 다시 돌아가도 내 자리는 없을 것이라 그랬나 보다. 산아래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서 인지, 눈물이 핑 돌아서 콧물까지 홀짝 거리게 했다.
늘 손해 보는 듯한 기분에 지쳐가던 나를 받아 준건 착한 텃밭 은신처였다. 내 마음을 잘 알아주었던 착한 텃밭과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상이란 걸 받고 싶었나 보다. 그 마음을 오랫동안 숨겨왔었는데,착한 텃밭이 알려주었다.
주는 만큼 다 받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말이다.기대보다는 걱정이 늘 앞서는 삶이지만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도 했다.씨앗을 심어 두듯 계속 시도하고, 물을 주듯 해야 할 일을 반복해나가야 했다.그 결과로 오는 보상은 그냥 운에 맡겨두어야 하는 것도과정이었다.
4. 텃밭의 마무리는 김장
배추는 속이 꽉 차고 달았다. 벌레가 먹은 것도 없었고, 꽃잎을 보는 듯 예쁜 프릴 장식을 단 배춧잎은 냄새도 향긋했다. 김장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뚝딱 해치워 버렸다.잘 자란 배추 덕분에 상을 받은 듯 김장하는 내내 설레는 마음이었다. 김치 먹을 때마다 착한 텃밭은 나를 또 우쭐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룻밤 소금에 절여진 배추는 김치로 버무려져 김치통 4개를 채웠다. 남은 채소들도 당분간은 그리운 텃밭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나의 첫 번째 텃밭은 마음이 착했고, 아이처럼 변화무쌍했다. 텃밭은 끝났지만, 착한 텃밭은 집으로 데려와 김치통에 잘 넣어 두었다. 다음 텃밭을 만날 때까지 내 곁을 지켜 줄 것이다.김장은 텃밭의 화룡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