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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Nov 26. 2021

타인의 텃밭을 넘보다

초록이 그리운 마음

 허전한 마음은 바로 텃밭 때문이었다. 텃밭이 끝났지만 눈앞에 자꾸 텃밭 작물이 오락가락했다. 동네에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작게 일구는 텃밭이 있다. 혹시 그 밭도 정리가 되었나 싶어 가 봤더니 아직 밭엔 뭔가 남아 있었다.


 긴 하지만 싱싱한 배추가 줄 맞춰 심은 화단의 꽃처럼 보였다. 다른 밭은 이미 바짝 마른 고추 대가 뽑혀있고, 들깻잎은 가시처럼 말라 붙어 있었는데 무척 대조적이었다. 홍갓과 청갓을 심은 밭도 아직 어린잎들이 추위에도 멀쩡해 보였다. 청이 단단하고 싱싱하게 자란 밭도 보였다. 가을 상추가 얼마 전까지도 잎을 뜯은 듯 건강했다. 씁쓸한 맛이 일품인 적치커리가을에 다시 심었는지 꽃대도 없이 무성했다.

무와 배추가 멀쩡했다 (2021.11.26)
상추와 적상추, 적치커리가 아직 파릇파릇 했다.(2021.11.26)

  다른 밭작물을 염탐하는 일은 초록빛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즐겨보기로 했다. 내일이라도 눈이 오다면 다시  수 없는 풍경이겠지만,  빈둥빈둥 산책하듯 가보고 싶다.

 

 서울 도시 안에 텃밭은 생소했지만, 밭주인들은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는 듯했다. 도시의 열기는 추위를 좀 덜 느끼게 하는 걸까? 밭주인이 늦장을 부리는 이유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왠지 나처럼 미루기 대장이거나, 성격이 느긋한 분일지도 모르겠다. 텃밭 안에 곱게 피어있던 백일홍은 바짝 말라 갈색으로 변했만, 그분들의 남은 작물들을 함께 응원하고 싶었다.


 주 할머니 우엉 팟엔 한겨울에도 배추가 있었다. 쪽파는 늘 삐죽거리고 올라왔고, 부추는 일 년 내내 줄기가 길어졌다. 눈이 내리면 두꺼운 비닐을 위에 씌우고, 신문도 헌 천으로도 덮어 주셨다. 쌀뜨물은 된장국을 끓일 만큼 남겨두고 곧바로 밭에 뿌리셨다. 달걀 껍데기도 전복껍데기, 보말 껍데기도  밭 어딘가에 놓였다. 서울 아파트에 이 작은 공간에도 고향 할머니의 정취가 느껴졌다.

 

  얼마 전에 벌레가 잔뜩 먹은 배추가 되어버린 더 작은 모퉁이 텃밭은 이제 배추 겉잎만 남겨두고 수확을 하신모 양이다. 추는 이지 않았다.

달랑 하나 남은 배추도 이젠 없다
고추와 호박 배추까지 완벽하게 만든 텃밭은 모두 같은 주인이다

 지난여름이었다. 수풀 같은 고추밭에서 딴 고추를 바구니에 넣으며 나오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가위를 꺼내더니 호박 덩굴에서 잎을 바구니에 넣었다. 상추가 있던 자리는 얼마 전까지 배추가 자라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곳도 모두 비어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지지 대위로 비닐을 덮어가며 배추를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김장 맛이 어떤지 궁금해진다.

 

 서울에서 그나마 작은 땅이라도 만질 수 있는 곳이 있다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시멘트가 발린 도시에 살고 있지만, 원하는 누구에게나 초록 채소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흙당근을 사 오면 꼭 하게 되는데, 꼭지 부분을 잘라 물에 넣어두면 싹이 올라온다. 물에 담근지 4일째가 되니까  까슬한 잎을 한 연두색 줄기가 나왔다. 잎이 길어지면 당근 향이 솔솔 풍길 것이다.

 고구마를 삶으려고 씻다가 끝부분 뚝 잘렸는데, 물에 넣어 두었더니 싹이 왔다. 땅을 못 만지는 손이 심심한 건지, 채소들과 보낸 시간이 그리운 건지 자꾸 초록 싹이 보고 다. 초록이 그리운 마음을 달래는 건 초록색으로만 가능한가 보다. 나는 겨울을 이렇게 초록 싹들과 그럭저럭 보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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