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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 Jul 03. 2021

무료한 집을 나와 유료한 독립생활

독립을 하다

2020년 2월 16일, 이직.


잊을 수 없는 날짜라는 게 있다. 부모님의 생신이나 연인과의 기념일 같은 것들. 최근까지 내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지금 회사로 이직한 2020년 2월 16일이다. 프리랜서 생활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패잔병의 마음으로 돌아간 회사였지만, 이젠 프리랜서로 버틴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이 회사에 다닐 것으로 예상된다. 실패나 패잔병 대신 전화위복을 좀 더 자주 사용해보기로 한다.


2021년 5월 20일, 독립.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날짜가 하나 더 생겼다. 2021년 5월 20일에 독립을 했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 계약할 때는 별생각 없이 정한 이사 날짜였는데, 찾아보니 손 없는 날이었다. 미신을 안 믿기 위해 노력하지만, 좋은 징조이므로 이럴 때는 믿기로 한다.


"독립하면 숨만 쉬어도 돈 나간다".


독립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맞는 말이다. 부모님과 사는 동안 내 삶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대부분의 순간은 부모님의 돈으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렇기에 더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부모님에게 평생 빚을 지며, 온몸이 빚으로 이뤄진 내가 더 빚을 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 대신 은행에 빚을 지기로 했다. 프리랜서였다면 대출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직장인으로 돌아와서 대출을 받았으니 돌아온 건 역시나 좋은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해본다. 학자금 대출을 모두 갚고 대출이 없는 삶을 잠시 살았으나, 이제 다시 빚이 생겼다. 은행에 진 빚은 어떻게든 갚겠지만, 부모님에게 진 빚은 아마 평생 못 갚을 거다. 대출 때문에 매달 나가는 아깝지만, 부모님이 내게 그동안 투자한 돈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다. 내게 투자한 부모님 입장에서 나란 녀석은 이자는커녕 원금을 까먹는 투자 상품에 가까울 거다.


이제 한 달 정도 되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즐겁다.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작 나올 걸 싶을 만큼. 늘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걱정이 넘치고, 무기력과 무료함 사이만 바쁘게 오가던 삶이 좀 더 즐거워지고 있다. 집에서 무료하게 지내다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매 순간이 유료인 독립을 통해 많은 게 바뀜을 느낀다. 


지도 앱에 저장해둔 '집'을 '본가'로 바꾸고, 독립한 집을 '집'으로 바꾼다. 이제 나는 '본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가끔 방문할 뿐.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제 막 써먹을 만 해지니 나가나 싶을 거다. 불효는 계속된다. 그래도 내가 즐거워야 부모님도 즐거울 거라고, 내가 없는 삶도 금방 적응하실 거라고 불효자다운 발상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나게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으나, 지하철 타면 30분 거리다. 


독립하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돈을 쓰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버는 게 힘들지 쓰는 건 늘 즐겁다. 그러므로 삶이 아주 재밌어졌다. 이제 고작 한 달 좀 넘었지만, 독립은 돈값을 하는 선택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모님이 보면 안 좋아할 글이나 쓰고 있지만, 독립은 내가 그동안 돈을 내고 한 것 중 가장 잘한 일이다. 


유료이지만 즐거운, 독립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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