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승 Jul 17. 2021

암막커튼이 우리 집을 구했어

갑작스러운 폭우, 창을 열고 나왔다

금요일은 별 거 안 해도 설렌다. 금요일을 어떻게 보내든 간에 주말을 통해 금요일의 과함 혹은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다. 현재가 아무리 불안해도 안정적인 미래가 보이면 버틸 수 있다는 걸, 어쩌면 금요일로부터 배운지도 모르겠다. 물론 매번 금요일만 바라는 것도 문제이지만 말이다. 분명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하는 금요일인데, 오히려 월요일이 기다리고 있는 일요일보다 더 속이 편하다. 현재보다 미래에 방점을 찍고 사는 내 삶을 요일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


머리가 자랐다. 나도 모르게 자라난 뒷머리를 손으로 열심히 꼬고 있는 걸 보니, 자랄 때가 되었다. 자취방에는 왜 이리 머리카락이 많은 걸까. 머리카락을 치워주는 곤충이라도 기를까 생각해봤는데, 바퀴벌레가 머리카락을 먹고살 수 있다는 게 떠올랐다. 청소기를 열심히 돌려보기로 한다.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젊음의 상징 같은 곳이다. 다만 이곳이 상징하는 젊음을 누리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내겐 젊음과 자본, 둘 다 없다. 미용실에서 계산하는 것보다 미리 계산하는 게 편해서 카카오헤어샵을 이용해왔다. 이번에도 카카오헤어샵을 실행한다. 우리 동네를 기준으로 미용실을 찾는다. 단번에 내게 딱 맞는 미용실을 찾으면 좋겠지만, 시행착오 넘치는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드물다. 욕심을 버리면 되겠지만, 취향에 있어서는 너무 욕심을 안 내고 살아서 욕심을 내보기로 한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비가 오면 대책이 없기에 늘 창문을 닫고 다닌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은 전혀 비 소식이 없고, 미용실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라 그리 멀지 않다. 설마 이 안에 거친 소나기가 오겠어. 창문을 열고, 며칠째 습한 날씨 속에 마를 생각을 안 하는 이불 빨래를 널어둔 채 미용실로 간다. 빈손으로 갈까 하다가, 밖에 비가 살짝 오는 것 같아서 우산을 챙긴다. 다행스럽게도 밖에 나오니 비가 그쳤다.


가격도 제일 저렴하고 리뷰가 많아서 방문한 미용실은 한산했다. 이발은 빠르게 진행되어서, 체감상 5~1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나는 내 눈을 잘 안 믿어서, 타인을 만나면 머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지 물을 예정이다. 주변 평이 좋으면 이 미용실에 계속 다니게 될 거다. 커트가 비싼 미용실에 가 본 적이 없는데, 점점 가격을 높여서 시도해보는 건 투자가치가 있는 일 아닐까. 이발을 마치고 머리카락이 가득 묻은 마스크를 미용실에서 준 마스크로 갈아 끼고 밖으로 나간다. 평소에 들고 다니는 에코백의 옆이 살짝 뜯어져서, 다이소에 가서 바느질 도구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불금의 열기는 재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바뀌어갔다. 미용실에서 큰 사거리에 도착할 때쯤 갑자기 비가 왔다. 소나기니까 금방 그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산을 쓰고 있어도 비를 맞았다. 비가 바람과 함께 옆으로 오고 있던 거였다. 대부분은 일기예보를 참고해서 우산을 안 들고 온 이들이었다. 


비가 감당 불가할 만큼 세차게 오자, 뛰던 사람들도 건물 밑으로 몸을 피한다.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집에 창문을 열어두고 왔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슬리퍼를 신고 나올 걸. 다 젖어버려서 물컹한 감촉을 내는 운동화와 양말을 느끼며 생각한다. 티셔츠와 반바지를 아끼는 걸 안 입고 와서 다행이라고, 가방 안에 짐을 빼두고 나오길 잘했다고 느낀다. 우산이 자꾸 뒤집힌다. 핸드폰이 방수가 안 되는 모델인데 무사할까.


집으로 오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친구의 스쿠터 뒤에 탔을 때 나왔던 웃음이다. 비의 속도감이 온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일까. 이렇게 강한 비를 맞은 건 오랜만이다. 비가 오면 애초에 나갈 생각을 안 한다. 재택근무 덕분에 세찬 비를 뚫고 출근한 적은 최근 들어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 웃는 걸까. 이 동네에서 웃을 일이 많을 것 같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젖은 옷을 모두 벗어 세면대에 던져둔다.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창문부터 닫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창문 바로 앞에 위치한 휴지가 흠뻑 젖어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다 쓴 휴지곽을 새 것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런데 집은 무사했다. 암막커튼 덕분이었다. 암막커튼을 설치할 때 기장을 좀 여유 있게 설치했는데, 그 덕분에 암막커튼이 온전히 비를 맞아주었다. 암막커튼의 살신성인, 아니 살커성인으로 집 안에는 물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젖은 암막커튼은 내일 해가 뜨면 마를 거라고, 암막커튼을 위로해본다. 집을 구하자마자 앞 건물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암막커튼부터 설치했는데, 이렇게 예상 못한 역할을 할 줄이야.


젖은 옷을 손빨래해서 건조대에 널어두고, 화장실에 비가 들이친 김에 화장실 청소를 해본다. 신발도 빨아서 널어두었는데 언제쯤 마르려나. 정리가 끝날 때쯤, 비가 그쳤다. 앞으로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창문을 닫고 닫아야겠다. 


"어둡게 이게 뭐야."


암막커튼을 본 이들마다 하는 소리다. 그러나 암막커튼이 창문을 열어두고 나간 주인을 구원해준 건 명백한 사실이다. 


앞으로는 암막커튼에 대해 잔소리하는 이들에게 말해야겠다. 암막커튼이 우리 집을 구했다고. 금요일에 미용실에 갔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긴 이야기를.



*커버 이미지 : Édouard Vuillard 'The Yellow Curtai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