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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원 Aug 30. 2023

해당화 4

구치소 투명 가림막 사이로 놈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도 술에 덜 깨었는지 멍한 눈빛으로 아래만 쳐다보고 있다. 여자가 울며불며 전화만 걸어오지 않았더라도,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하면 되었는데, 이렇게 어이없는 사건이라면 더더욱 올 필요가 없었는데 하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경찰이 심드렁하게 말한 전말은 이랬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영정 사진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며 난리를 피우다가 나중엔 조문객 중 한 남자를 칼로 위협했고 다행히 칼이 빗나가서 다치진 않았다, 술에 취해서 망정이지 맨 정신으로 했다면 살인이었을 텐데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운이 좋았다, 어찌 된 일인지 피해자가 고소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고인과 피해자 가해자 모두 고등학교 동창이고 오래전에 있었던 오해 때문인가 본데, 오늘 중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굳이 여기에 달려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놈이 사람을 죽여 종신형을 받게 되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달려왔을 뿐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본심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아야 한다. 이제 끝이다. 침묵으로 끝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이 비겁하고 나약한 놈에게 내리는 벌 중의 가장 혹독한 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놈은 결국 그런 나의 결기를 꺾고 말았다.   

   “그 새끼의 출소일만 기다렸어. 살인미수로 십오 년 형을 받은 그 새끼를 말이야. 그런데 그 새끼가 모범수로 일찍 출소했다는 거야. 그 새끼를 찾으러 백방으로 다녔지. 그러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러나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죽었더라고. 할 수 없이 장례식장에서 그 패거리들을 기다렸던 거지. 하지만 한 놈만 온 거야. 나머지 한 놈은 이미 오래전에 사고로 죽었다는 거야. 비록 한 놈 밖에 처리하지 못했지만…해당화 울타리 쪽으로 질질 끌고 갔던 놈을 처리했으니까 그것으로 족해. 칼을 든 놈도 발로 너희들을 걸었던 놈도 이미 죽었으니까. 이제 끝났어.”   

   말을 마친 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혼령이 나의 몸을 빌려 말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가 내 입을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뜻대로 그렇게 되지 않아서 어떡해?  죽이기는커녕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으니까. 다행이지 뭐야. 그렇게 쉽게 끝나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남의 그림이나 흉내 내면서 고통스럽게 살아야겠지.” 

   놈의 눈동자가 커졌다. 놈이 투명한 가림막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깊숙이 찔렀는데, 뒤로 쓰러지는 것을 봤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오빠가 돌려보냈지? 큰언니가 집으로 왔을 때 말이야.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몸을 팔든 웃음을 팔든 여기보단 나을 거라고. 큰언니가 오면 오빠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오빠는 언니를 두 번 죽인 셈이야. 다 알고 있었어. 이 말을 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오빤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묻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살아온 세월이 어땠는지 알아? 그래 놓고, 지금 복수한 거라고 떠드는 거야? 고작 그 천재화가의 명성에 빌붙어서 죄의식을 덮으려고 하는 가 본데 과연 그걸로 오빠의 죄가 없어질까. 오빠의 몸이 캔버스가 되어야지, 오빠의 몸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피가 물감이 되어야지, 그래야 공평해져. 우리 모두가.”

   그때 접견시간이 끝났다는 부저가 울렸다. 나는 뒤돌아섰다. 놈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등을 돌려 놈을 바라보았다. 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치며 일어서고 있었다. 놈은 문을 나가 교도관 쪽을 향해 걸어갔다. 놈의 축 늘어진 어깨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놈이 그렸다던, 절대 팔지 않았다던 그림이 눈앞으로 확 다가오는 듯했다. 보라색 소파 위의 세 여자가, 정물처럼 앉아있는 세 여자가 일제히 일어나서 빛의 무리처럼 투명한 가림막을 통과하여 잿빛 복도를 지나 조금 전 사라진 놈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황영감은 입김을 연신 뿜어대며 미역다발을 손질하고 있다. 겨울해가 뉘엿뉘엿 스러지고 있다. 오늘도 한밤중까지 작업은 이어진다. 나는 흠집이 난 미역을 칼로 사정없이 잘라낸다. 여자가 전화를 걸어와 희소식이라며 전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이가 해당화를 완성했어. 세 여자 모두 완전하게 채색을 마쳤어. 내 눈엔 이인성화가의 그림보다 더 잘된 것처럼 보여. 이제 또다시 그리기 시작했어. 참, 나 여기서 미장원을 열거야. 살아야지. 살려면 그이 옆에 붙어있어야지. 개업식에 초대할 테니까 꼭 와 줘. 스님에겐 이미 내가 전화했어.”  

   내가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을까, 황영감이 나에게 말했다. 

"며칠 내 이 미역 작업도 끝이 나겠구먼. 그러면 자네 집 앞바다에 갈 수 있겠지. 친구를 만나러 말이야." 

   불쑥, 놈의 해당화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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