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그의 집을 나오면서
노트북 챙기는 걸 깜빡했다.
노트북 없으면 논문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문자를 보내서 퇴근 후 데리러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 : '오늘 하루 어떻게 하려고? 내가 점심시간에 가져다 줄께. 너랑 점심도 먹고'
나 : '아냐. 괜찮아. 일주일이나 집을 비웠더니 할게 많네. 빨래, 청소, 장보기... 오늘 하루 그거 하고 있을께.'
그 : '그래? 그럼 이따 저녁때 봐. 너를 볼 수 있는 좋은 핑계가 생겼네.'
나 : '하하. 이따 내가 저녁 만들어 갈께.'
그 : '잘 되었다.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나 : '그럴 줄 알고 해간다는 거였어.'
나는 그 날 저녁 메뉴로 볶음우동과 김말이를 해갔다.
김말이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고, 우동은 잘 먹었다.
식사 후 소파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하는 말.
그 : 너는 좀 특별해.
나 : 뭐가?
그 : 왠지 너랑은 오랫동안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 : 아... 그걸 어떻게 알아?
그 :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야.
나 : 글쎄, 난 솔직히 그런 말 믿지 않아.
그 : 왜?
나 : 몰라. 그냥... 전에는 그런 느낌 받은 적 없어?
그 : 없어. 넌 좀 달라.
나 : 하지만 난 한국으로 돌아갈 지도 모르는데?
그 : 가지마. 나랑 여기 있어.
이 대화를 할 때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그가 내게 동거와 프랑스에서 머물것을 제안했을 때,
나는 사랑 같은 거 믿지 않으며
유학의 목적과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물론 그 사람으로 인해 관심과 애정을 주는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랬다.
7년을 사랑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 틀어졌다보니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는 없는 미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아픔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내 일도 그랬다.
늦은 나이에 유학왔으니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내 인생은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 무시 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진짜 잘난 사람되어 잘 먹고 잘사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와 함께 하려면
내가 세웠던 계획은 모두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프랑스의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의 조카도 내가 하는 말 잘 못 알아 듣겠다고 비웃는데.
그 : 가지마. 나랑 여기 있어.
나 :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나는 네가 좋지만 그렇다고 내 커리어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은 걸.
그 : 여기서 일 찾으면 되잖아.
그는 일에 대한 열망이 없다.
그의 꿈은 자그마한 정원 딸린 집을 사고,
아이들,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돈은 뭘로 벌든 그 꿈을 실현시켜줄 만큼만 벌 수 있음 그걸로 된 사람이다.
반면, 나는 일에서 자아를 찾는 사람이다.
줄곧 영화라는 꿈만 꾸고 살았고
내 삶의 모든 결정은 그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프랑스에 남을 것이냐 아니냐의 답은 쉬웠다.
원래 계획대로 한국에 돌아가서 박사 공부를 할 것.
그 : 나는 네가 최대한 빨리 내 아파트로 이사왔으면 좋겠어.
나 : 왜?
그 : 같이 살아보면, 우리가 앞으로 함께 잘 살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잖아.
너 이제 공부 마치려면 1년 남았으니까 그 일년 안에 그걸 알아봐야지.
나 : 모르겠다. 난 겁나는데.
그 :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안해보고 후회하는거 보단 낫잖아.
일단 한, 두달 네 아파트, 살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어. 만약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잘 안맞는다면, 다시 그리로 돌아갈 수 있게.
나 : 난 진짜 헤어지는게 싫어. 이제 지긋지긋해. 그래서 같이 사는거 겁나.
나는 동거라는 문화가 겁난게 아니라
같이 살면서 서로가 일상이 되면 나타날 변화들이 두려웠다.
데이트와 생활은 다르다.
서로 잠깐 예쁜 모습만 보일 수 있는 데이트는
이별의 시점을 좀 더 미뤄줄 수 있을거라고 난 믿었다.
나의 생활을 공유하는 순간
연애는 반짝 반짝 빛나는 대신 은은한 조명등 같아질테고
사소한 생활 습관 차이가 쌓이다보면
서로 미워질 수 도 있는거니까.
그 : 그래도 시도 안하는거 보단 낫잖아. 내가 너는 좀 특별하다고 한 거, 진심이야.
정말로 넌 달라. 오랜 시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고, 너라면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 : 그래. 알았어. 푸. 어렵다.
그는 잠깐 나를 안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 맞다 ! 주말 내 아파트에서 보내고 네 집으로 돌아가면 기분이 어때?
아 ! 드디어 집에 왔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 하면서 신나? 아니면 아쉽고 그래?
나 : 음. 두가지 마음이 들어. 일단 집이 제일 편하니까 안도감이 들고, 네가 다시 보고싶기도 하고.
솔직히 나는 개인공간이 필요한 인간이다.
늘 누군가와 함께 있는거 보다 혼자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
게다가 남의 집이다 보니 그렇게 편하지도 않고.
그래서 주말 내내 같이 있다가 집에 돌아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앉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 내 눈 똑바로 봐.
내가 눈을 응시하니 그는 말을 이었다.
그 : 네가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 여긴 너의 집이기도 한거야. 우리집이야. 알겠어?
불편하다는 마음 갖지 말고 네 집처럼 행동해야해. 약속해?
나 : 응.
그 : 여기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 네 마음대로 바꿔도 돼. 네 집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저 액자에 네가 원하는 사진을 넣어도 돼.
나는 진지하면 간지럽다.
나 : 음. 핑크에 꽃 벽지 해도 돼?
그 : 음... 꽃 한 송이는 허락해줄께.
나 : 에, 그런게 어딨어.
그 : 난 정말 행복한거 같아.
나 : 왜?
그 : 너도 있고, 직장도 있고, 건강하고...
긍정적이라서 보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도 직장 스트레스가 있고
나에게서도 어떤 불만이 있을텐데
그는 그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게 멋졌다.
늘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며 살았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 : 네가 아침에 노트북 가져가는거 잊어버렸다고 했을때, 나 진짜 기분 좋았다.
나 : 왜?
그 : 이런 생각을 했어. 노트북 핑계로 오늘 저녁을 너랑 같이 보낼 수 있고,
내일은 북경 익스프레스 보자는 핑계로 같이 있을 수 있고...
목요일은 핑계가 없네, 하면서 슬펐지만 금방 또 금요일 토요일 주말이 오니까...
난 너랑 매일 같이 있고 싶어. 네가 이사를 오면 나는 요리를 하고 넌 청소를 해. 하하하.
나 : 뭐? 하하하. 그럼 매끼? 아침 점심 저녁?
끄덕끄덕 하는 그. 다시 확인했다.
나 : 진짜 아침 점심 저녁 다?
그러니 표정이 야릇해지는.
그 : 음...
우리 둘은 웃었다. 그가 물었다.
그 : 같이 사는거 무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나지 않아?
난 그래. 기대되기도 해. 내 아파트에 욕조가 없어서 목욕물은 받아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시지도 해주고 요리도 해주고 잘 해줄께.
물론 같이 사는 지금, 그가 매 끼니를 요리하거나 마사지를 매일 해주는 건 아니지만,
쓴 물건 제자리가 아닌 쓴 자리에 놓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좋다.
그의 로맨틱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에도 좋은 건,
그가 나의 마음을 채워주고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때 내가 집에 있고
매일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 : 그럼 우리 같이 살면 네 부모님께 거짓말 해야해?
나 : 응.
그 :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해도 안될까?
나 : 응.
그 : 알았어. 십대가 된 기분이다.
나 : 왜?
그 : 거짓말해야하잖아.
나 : 하하하. 너 십대때 거짓말 많이 했구나.
그 : 아니야. 난 착했다구...
영화 볼래?
말 돌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