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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정나그네 Oct 11. 2016

양자역학과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보는 인생

정확한 답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 양자역학이 이슈가 되며, 과학자들이 집중해 연구하고 있는 분야이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만큼 그 세계가 넓어지듯, 양자역학에 대해 최근 지인과의 화두 거리로 몇 번씩 언급되면서 나의 궁금증은 더해졌다.


수학에서도 확률을 제일 좋아하는 나는 확실한 답을 좋아한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는 답이 없기 때문에 재미보다 불안함을 느낄 때가 더 많은 것이다.



#1


"양자역학에 대해 아나요?"


양자역학이 뭔지 몰라서 나는 바로 네이버 검색을 해서 보았다.

양자역학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양자’와 ‘역학’을 각각 살펴보는 것이 좋다. ‘양자(量子)’로 번역된 영어의 quantum은 양을 의미하는 quantity에서 온 말로, 무엇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학(力學)’은 말 그대로는 ‘힘의 학문’이지만, 실제로는 ‘이러저러한 힘을 받는 물체가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물리학의 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힘과 운동’의 이론이다. 이렇듯 양자역학이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캐스트 참조

네이버 검색으로도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영 알 수 없지만, 양자역학에 대한 질문을 던진 사람의 요점은 현재 네가 집중하고 있는 세계가 다가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단순히 현재 나이에 접하는 문제보다 더 크고 넓고 장기적으로 삶을 바라볼 필요가 있단 것을 양자역학과 인터스텔라를 인용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2차원 평면적인 세계를 넘어서 보라는 것이다. 양자 역학에 대해 충분히 이해 못한 나도 이 점에 과히 공감했다.



#2


나는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과생인 친구가 양자역학을 알 거 같아서 물어보고 싶었다.


"양자역학에 대해 알아?"

"양자역학, 알지."

"양자역학이 뭐야?"

"컴퓨터는 0과 1로 된 언어만을 사용하잖아, 그런데 0과 1 두 상태를 동시에 가지면서, 그 사이에 다른 상태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거야. 동시에 수많은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거지. 양자역학을 이용해 양자컴퓨터를 연구하고 있잖아. 그렇게 되면 암호화도 되고."

"음? 그게 뭐야. 어떻게 그런 상태가 있을 수 있어? 난 이해가 안 돼. 0과 1이 아닌 상태가 어떻게 존재해?"


나는 친구에게 더 넓은 세계를 이야기해주려다가,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양자 역학에 대해 친구에게 따질 뻔했다. 그런 상태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그건 확실한 답이 아니었다.



#3


책을 읽다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발견했다. 사실 뭔지 몰라서 찾아보니 양자역학에 관련된 화두가 아닌가.

고양이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자 속에 들어있고, 이 상자는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과 연결되어 있다. 독가스는 밸브에 가로막혀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독가스가 든 통 역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밸브가 열리는지 볼 수 없다. 이 밸브는 방사능을 검출하는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기계 장치는 라듐 등이 붕괴하며 방출한 알파 입자를 검출하여 밸브를 연다. 밸브가 열린다면 고양이는 독가스를 마셔 죽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라듐은 단위 시간당 50%의 확률로 알파 붕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단위 시간이 흐른 후에 고양이는 50%의 확률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실험자는 외부에 있기 때문에 관찰이나 간섭을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대답을 해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1시간 후에 절반의 확률로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는다. 당신은 그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 1시간 후 상자 속의 고양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역설을 제시하는 목적의 사고 실험이며, 진짜로 실험을 할 수는 없다.
슈뢰딩거는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 고양이"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며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반드시 살아있거나 죽은 상태여야 하기 때문에, 그 둘 사이의 어디쯤이 아닌, 양성자 역시 붕괴했거나 붕괴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위키피디아 참조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불쌍하다. 고양이를 뒤로하고 슈뢰딩거가 말하고 싶은 거는, 그런 애매한 상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상자를 열어보면, 고양이는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분법적일 수 있고, 고양이를 실험하며 양자역학에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한 예인지는 물리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로서는 모르겠다.

만약 물리적 장소인 상자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고, 물리적 시간 1시간이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며, 고양이가 나라면?



사실 난 양자역학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모르겠다. 다만 양자역학과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에 잠깐 생각해보게 된다. 삶이란 어떤 상태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삶을 관찰하면 몇 퍼센트의 확률로 성공할 수 있고, 100%가 행복이 끝이라면 과연 몇 %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까?

처음 양자역학으로 화두를 던지며, 내게 삶을 단순히 보지 말라던 사람이 옳았다 생각한다. 확실한 답을 좋아하는 나지만, 양자역학이 이해되지 않아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 확실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다양한 상태가 공존할 수 있다고 본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이 삶을 만들어간다. 오늘도 난 귤을 까먹을지 말지, 화장실을 지금 갈지 조금 더 참았다가 갈지 고민하며 작은 선택을 하고 있다. 이런 선택에 과연 옳은 선택과 답, 성공으로 가는 확실한 길이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선택을 옳게 만들어가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고, 장기적인 2차원을 넘어서는 세계 속에서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물리적인 현재의 시간이 다가 아닐 수 있다. 우주 속에서 작은 먼지 같은 인생이 아니라, 몇백 년 후에 누군가에게도 저 멀리 아프리카에 사는 누군가에게도 당신의 작은 선택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인생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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