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을 정리하다 손잡이 하나를 발견했다. 몇 년 전 살던 집의 것인데, 둥근모양이라서 손이 미끌거릴 때 잡으면 불편했다. 결국 기다랗게 생긴 손잡이로 바꾸어 달았는데 원래대로 교체하지 않고 가져온 것이다.
예전 집이 생각났다. 낡고 좁고 불편했던 집. 그 집엔 이 손잡이가 더 어울리는데.
그 집을 이사 나오면서 안도의 한숨까지 내 쉬었다. 그 뒤로 그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집 쪽으로 갈 일이 있어 그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사한 지 몇 년 정도 지났을 뿐인데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정이 들었나 보다. 슬금슬금 우릴 적시는 정이라는 괴물. 그 괴물은 스며들 땐 모르다가 불현듯 머릿속에 클로즈업되는 존재다.
어린 시절 이사를 가면 그전에 살던 집이 그리워 어쩔 줄 몰랐다. 그 집에서 보낸 추억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그 집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때 대문에서 나오던 낯선 사람들은 마치 내 집을 빼앗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사 가던 날 어른들은 지금의 나처럼 홀가분했을 것이다. 장롱 뒤편의 묵은 먼지도 떨어내고 명분이 없어서 버리지 못했던 잡동사니를 버릴 기회가 왔으니.
하지만 우연히 그 집을 지나치다가 울컥하고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초라한 그 집에 대해 느끼는 연민 내지는 후회로.
모든 이사는 슬픔을 머금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슬픈 이사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과도 헤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 해외로 이민 가는 것? 아니다. 나라가 달라져도 사는 모습은 비슷한 구석이 많다. 멀리서나마 연락할 방법도 있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 그것은 '죽음'이라는 이사다. 이삿짐을 꾸릴 필요도 없고 그냥 빈 몸으로 가면 되는 것. 가면 다시 못 오는 것.
죽고 나면 내가 살았던 이 세상에서의 흔적은 어떻게 될까? 내가 죽어서 육신이 없어지는 건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하지만 내 의식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수가 없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내 생각이 없어진다면? 내가 나인지 아닌지 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다니.
내 육신이, 내 팔이나 다리가 아프다 시원하다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 그게 대체 어떤 느낌일까?
동생이 죽어가던 순간이 생생히 떠 오른다. 동생은 수면주사를 맞은 뒤 깊고 깊은 잠에 빠졌다. 하지만 귀의 감각은 살아있었나 보다. 남자 친구가 와서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갑자기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병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장례 절차들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 걸 동생이 다 들었을 생각을 하니.
병원에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준 이후 모두 비상대기 상태였다. 1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주었다. 동생의 팔다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껴서다. 특히 발이 저릴 것 같았다.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다리가 저린 경험이 많아서다. 그래서 계속 주물러주면서 생각했다.
'세정아. 기억나? 우리 어릴 적 처음으로 어린이 대공원 갔던 거? 그때 너 청룡열차 탔던 거? 그때 넌 키가 안 되어서 탈 수 없었지. 그런데 넌 까치발을 하고는 용케 통과했어. 그렇게 타고 싶었니? 그런데 나는 곧 그 열차 탔던 걸 엄청 후회했어. 너무너무 무서웠거든. 그런데 너는 잘도 타더라. 나는 울고 토하고 난리였는데 너는 한번 더 타고 싶다는 거야. 넌 항상 용감했어. 그런데 이제 진짜 용감해져야 할 순간이구나. 넌 이제 정말 특이한 열차를 타게 되는 걸? 얼마나 길고 지루할까? 너 혼자 타야 하니 말이야.'
그때 멀리서 온 친척이 자기가 대신 주물러 주겠다고 했다. 얼핏 보니 밤이 깊었는데도 내 어린 딸이 병실 바닥에서 잠을 안 자고 조용히 놀고 있었다. 재워야 했다.
그런데 동생에게서 의식이 없는 걸 느꼈나 보다. 다리를 계속 주물러주던 친척이 말했다.
"다릴 왜 주물러 주어야 하는 거니?"
그래서 내가,
"그냥요."
하니, 친척이 주무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이해했다.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죽어가든 말든 내 눈 앞에 있는 동생이 팔다리가 저릴 거야 라는 생각. 만약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다면 다리가 시원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딸을 안고 토닥토닥 재웠다. 그때 아기인 딸의 팔이 '참 포동포동하고 따뜻하구나.' 하면서 나도 잠깐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핏 잠이 들었나 보다.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서 깨어나 보니 병원이 분주했다. 이제 동생이 진짜로 떠난 것이다. 즉 이사를 갔다.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삿짐은 집이 바뀔 때마다 항상 새집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이 이사에서는 모든 짐이 남겨졌다. 그 처리는 온전히 남겨진 이들의 몫이었다. 그땐 몰랐다. 그 짐은 평생 처리하지 못할 거라는 걸. 동생의 마지막 이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