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공기마저 차가운 어느 겨울날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길을 나서게 되었는지, 아빠와 나를 그곳으로 이끈 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털모자가 사고 싶었고 아빠한테 털모자를 사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아빠와 손을 잡고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작은 가게에 걸려있는 초록색 털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 나 저거!"
아빠는 좁은 문을 열고 가게로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창밖에서 골랐던 초록색 털모자를 달라고 했다. 여자들만 가득 들어선 작은 가게에 아빠가 들어가서 모자를 고르는 모든 과정들이 조금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달까. 아빠도 머쓱하고 민망했을 텐데. 아빠를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초록색 털모자를 아주 오래 썼다. 당신을 기억할 물건들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잘 기억해두어야겠다고 마음먹는 나날이다.
엄마와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엄마는 가끔씩 귀엽게 말한다.
“장연지가 좋아하는 과일은 복숭아, 사과, 무화과, 참외!”
크게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나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엄마에게 딸이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별말을 하지 않아 서운한 내색을 한 적이 있다. 과일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 오빠가 두어 가지 좋아하는 건 기억하면서, 좋아하는 나는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 모르냐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는 늘 알고 있었다. 어디선가 맛있는 과일이 있으면 내 몫을 꼭 챙겨 왔었으니까. 꼭 누가 맛있다며 한두 알 주는 과일이 있지 않나. 엄마는 꼭 그런 복숭아를 휴지에 꽁꽁 말아 집으로 가져왔다. 객지 생활을 하다 본가에 오랜만에 올 때도 냉장고 문을 열면 복숭아와 무화과가 있었다. 엄마의 표현 방법이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과일은 감과 배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일 두 가지다. 감과 배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감과 배? 어쩐지 어감부터 과일스럽지 않다. 새콤한 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과일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달콤하니 시원한 맛을 아빠는 즐기는 것 같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포도다. 아무리 달콤하고 톡톡 터지는 샤인머스켓이라 해도 엄마의 순정은 켐벨 포도다. 켐벨 포도는 씻을 때부터 포도향이 가득 퍼지는데 그때부터 포도 덕후 경희는 설레는 것 같다. 포도를 깨끗하게 물에 씻은 뒤 그릇에 놓기가 무섭게 한 송이가 사라진다. 오죽했으면 엄마한테 포도 한 송이를 먹는데 2분 안에 먹는 것 같다고 놀리듯 말하면 엄마는 웃으며 꼼꼼히도 포도알을 골라 입에 넣는다.
시장을 가거나 마트를 가면 가족의 취향을 들여다본다. 포도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나고, 감과 배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엄마 아빠가 과일을 마음껏 드실 수 있을 때 맛있는 과일을 많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주던 휴지에 꽁꽁 싼 복숭아와 초록색 털모자를 오래 추억하며 산다. 목 늘어난 티셔츠와 편한 잠옷 바지를 입고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우리가 함께 오래오래 감과 배, 포도를 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