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마음을 진짜라고 믿으며
언젠가 친구가 버즈의 ‘나는 겁쟁이랍니다.’ 부분을 ‘나는 외톨이랍니다.’라고 불러서 모두가 깔깔대며 배를 잡았던 기억이 있다. ‘외톨이’라는 단어를 보자 그때의 일이 생각이 났고 이제는 내가 웃지 않아서 피식 웃었다.
“넌 뭘 잘하지?”
“없는데요.”
“사람들을 잘 관찰하지?”
“....”
“그건, 우리 외톨이들의 특징이란다. 넌 반에서 가장 관찰력이 좋은 녀석일 거야.”
(희한한 위로 中- 강세형)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관찰하다가 좋아진 것인지 좋아하기 때문에 관찰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도 한 번의 힐끗거림으로 매일 쓰던 아이섀도를 유사한 다른 색으로 바꾼 것까지 그냥 알 수가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뀐 아이섀도를 알아채는 것처럼 쉽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한 시절을 끝내고 다른 시절에 들어서야만 그때의 과오를 깨닫게 되는 존재로 프로그래밍된 것 같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포착한다고 자부하며 타인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규정했다. 이것이 내가 했던, 지금도 여전히 하는 수많은 과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단지 내 생각이 만들어낸 사람일 뿐이다. 실망했다는 건 내 생각이 만들어낸 기대에 부합하지 않아서 내 마음이 실망한 것인데 우리는 그가 내게 실망감을 줬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애정하는 존재일수록 자신만의 기대감은 커진다. 자신이 숨을 쉬듯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관계가 끝났을 때야 무엇을 원했는지를 알게 된다.
‘... 나는 거북이야.’
‘아니야! 내가 아는 너는 분명 토끼야. 거북이일 리가 없어.’
자신이 아무리 거북이라고 말한들 상대방이 토끼라고 생각하면 그에게 나는 토끼가 돼버린다. 나는 나를 거북이로 인정해 주는 마음, 자신이 바란 건 토끼였지만 거북이라도 괜찮은 그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애정했던 그가 거북이였다는 사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그 사람은 토끼라고 믿었던 자신의 마음을 사랑한 것일 뿐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가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불가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 모습과 말과 행동으로 말하지 않았던 내 생각과 마음까지 추측하고 마치 잘 안다는 듯이 나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실망하고 화를 내고 싫어하고 미워했다. 우리가 평생토록 당연하다고 여기며 해오던 일이다. 서로의 진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진짜 모습을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진짜라고 믿으며.
우리는 자신은 감히 하지도 그 불가능의 영역에 있는 사랑을 상대방에게 갈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한때의 사랑을 하고, 우리의 사랑은, 아니 나의 사랑은 고작 이 정도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