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꿀 떨어지듯 바라볼 수 없게 된 내 머리 위로
첫눈이 내렸다는데 자느라 몰랐다. 오해 마시라. 주말에만 늦잠을 잔다. 주중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도끼눈을 뜨고 주식 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 꾸준함에 나도 질릴 지경이지만 소득은 없다.
첫눈이 내린 날에 약속 시간이 남아서 역에서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바글대는 사람들. 다시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밖은 몹시 춥고 머리카락이 회오리가 되어 날아갈 만큼 세찬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리기 싫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 공간은 좌, 우의 테이블과 바짝 붙어있어서 꼼짝없이 그들 모두와 일행이 된 것 같다. 방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우측 테이블의 남녀에게 쏠렸다.
가까이 있어서 나란히 앉은 여자의 얼굴은 쳐다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은 너무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톤은 ‘라’였다. 도레미파솔라 라라라. 맞은 편의 남자 얼굴은 한 번 정도는 힐끔 쳐다볼 수 있었는데, 이런. 잘생겼잖아. 잘생긴 남자를 실제로 본지가 오랜만이라 많이 놀랐다.
그래. 엿들은 게 아니라 들려서 들었다고 항변하고 싶다. 그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자전거 동호회 회원인 듯했다. 여자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출장 오는 김에(과연 그럴까) 실제로는 만난 적 없는 남자에게 연락했고, 이렇게 그들은 내 옆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외계생명체의 고주파 공격처럼 느껴졌지만 남자는 그 공격을 정면으로 맞으면서도 연신 수줍게 웃어댔다. 그들의 대화는 한마디로 노잼이었다. 핑퐁 건네면 핑퐁 받아치는 맛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처럼 긴장되었다. 그들과 한 몸이 되어 그 어색하고 설레는 순간을 견뎠다. 아니, 즐겼다.
자신이 잘생긴 줄도 모르는 남자는 멋도 부릴 줄 몰랐다. 기껏 신경 써서 나온 게 블랙 눕시에 그레이 트레이닝팬츠다. 잘생겼는데 멋까지 부릴 줄 아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잘생겼다. 그들이 자리에 일어서서 나갈 때가 돼서야 여자를 봤다.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는 레깅스에 니삭스를 신고 크림색 플리스 후드 집업을 걸쳤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한쪽 손으로 쳐서 어깨 뒤로 넘긴다. 화사한 코랄 톤의 메이크업을 얹은 얼굴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쁘다.
바람이 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이 서글픔은 무엇인가. 저 멀리 건너편에서 무심결에 눈이 마주친 아저씨의 눈빛이 그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었다. 내 껍데기가 옆 테이블의 그들과 같이 젊고 싱싱했을 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눈빛과 지금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의 눈빛은 사뭇 다르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은커녕 호감 가득한 눈빛을 받아 본 지가 언제였던가. 이를테면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애와 같은 눈빛 같은 것 말이다.
중년을 타깃으로 건네는 아파트 분양 전단지를 아직은 받지 않는다는 걸로 겨우 붙들고 있던 내 맘이 비로소 탁. 끊어졌다. 누군가의 꿀 떨어지는 눈빛을 받지 못하고 누군가를 꿀 떨어지듯 바라볼 수 없게 된 내 머리 위로 바람이 부는 것 같다.
다시 젊고 싱싱한 껍데기를 뒤집어쓴다 해도 마음을 홀딱 주는 일은 이미 물 건너갔다.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나의 꿀은 개, 고양이 한정이 되었다. 그건 사실 늙어서라기보단 그동안의 경험이 누군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tv에서 키스신이 나오면 키스 같은 걸 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라 몸서리치게 징그러워져서 채널을 돌려버리지만, 첫눈이 내렸던 날 본 그들이 밤을 함께 보내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랑 타령을 하기엔 몸과 마음이 전과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은 그놈의 사랑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구경이라도 할 수 있게. 내게도 그 정도의 사랑은 남아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