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실명을 유발하는 3개의 질병이 있다.
녹내장, 백내장, 황반병성이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고, 녹내장 판정을 받았다. 작년 건강검진에선 이상이 없었는데 1년만에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싶다.
출산 후 얼마 안돼서 일하겠다고 무리를 했던 게 이렇게 돌아왔다.
하루종일 모니터를 보는 일이다보니 눈이 욱신거리고 따가울 때가 많았는데, 그저 과로해서 피곤한거라 생각했었다. 무시하고 일하다 병을 키운 모양이다.
안과에선 약을 일정한 시간때에 넣어주면 시신경 손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시신경 중단을 멈추고 잘 유지하면 평생 실명을 면할 수도 있다고. 내 나이가 젊다는게 좀 걱정이 되긴 하다만.
아침 저녁으로 안약을 빼먹지 않고 넣는게 중요하다. 거꾸로 물구나무 서기 같은건 안압을 높일 수 있으니 주의를 해야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겠지.
또 초음파를 보다가 몸의 어딘가에 혹이 있다고 해서 조직검사도 하고 왔다. 커다란 총 같은 바늘로 그 혹을 찔러서 암세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마취는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일을 할 때, '이보다 잘 할 수 없게' 라는 마음으로 한다. 그러려면 내가 제일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고,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그려야 한다. 캐릭터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기초를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아득함에 가끔 정신을 잃을 때가 있다. 정신 잃으면 잠깐 쓰러졌다가 다시 뺨 짝짝 때리면서 일어나 하면 된다. 아무래도, 내가 제일 잘 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힘을 내어서 가본다. 손에 잡히는게 지푸라기던 모래같은 것이던. 그게 전부다.
중요한 건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무슨 이야기를 중심에 둘 것인가. 흔히 말하면 주제라고들 한다. 초점만 살아있다면, 시야가 좁아져도 괜찮다. 목표점은 명확한 거니까.
요새 인기 있는 타입을 가르켜 '육각형' 타입이라고들 한다. 가시적인 조건면에서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이성이라나. 나는 개인적으로 육각형 싫어한다. 그냥 한가지 분야에 뾰족하고, 샤프한 사람이 더 낫다. 예를 들면 학벌은 좋지 않지만 돈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장사꾼이 무난한 학벌에, 무난한 직장을 가진 사람보다 배울 점이 많다.
부모님 노후 안정화 여부도 결혼시장에서 뭐 되게 따지는 것 같다. 제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면, 부모님 노후가 안정적인지 불안정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 사람이 집안 사람들 다 먹여 살린다. 그런 능력자들은 육각형이 아닐 확률이 아주 높다. 애초에 육각형인 사람은 그런 포지션에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 또는 주말에 몸 만들러 운동하러 다닌다. 육각형인 사람은 죽어라 알바를 하거나 제대로 돈을 벌어볼 작정으로 온갖 위험하고 더러운 일에 뛰어들어 세상 볼꼴 못볼꼴 보면서 사업가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것 말고도 선택지가 많은데 굳이? SKY 출신으로 장사의 신이라 불리는 백종원 대표도 육각형 인물은 결코 아니다. 배나온 푸근한 아저씨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결국 무엇을 포기할지 정하는 일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원한다면, 상대방 나이나 외모, 인성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멜라니아 여사를 한번 보시길. 도널드 트럼프 같은 남자와 세번째 아내로 결혼해 성격에 맞지 않는 영부인 생활 하느라 고생 중이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인생에서 꽤나 많은 걸 포기하고, 체념한 눈빛이다.
예쁘고 날씬하고, 어린 아내를 원하면서 동시에 소위 말하는 개념(?)이라는 것도 있고, 돈도 아껴쓰길 원한다는 게 앞뒤가 안맞는 요구다. 미모와 몸매를 유지하는 건 돈이 많이 든다. 거기다 어린 나이란 결코 영원하지 않다. 경제적인 걸 포함해 이것 저것 잘 따지는 성격이란 대체로 피곤한 성격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연인&배우자감으로 그런 성격을 원하는 건 또 아니잖아.
스스로 선택했다는 건, 그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다. 그 뜻은 곧 자신이 포기하기로 한 것에 대해선 미련이나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인생에 별 후회가 없다. 녹내장에 걸리고 몸 속에 혹을 키울 정도로 과로해 일한 것도. 무뚝뚝하고 차가운 배우자와 사는 인생도.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요 팔자다.
그래서 죽음이 내일 닥쳐온다 해도 별 생각이 없긴 한데, 갑자기 엄마 없이 자랄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니까 눈물이 나오는 식이다. 그럼 언제 죽으면 미련이 없을까를 생각해보면 역시 그런건 없다. 삶에는 언제나 미련 같은게 남기 마련이다. 100살 넘겨서 죽는다 해도 그럴 것이다. 그런 마음들을 전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이를 낳아서 이 세상에 아주 작게나마 기여를 했다는 생각이 들고, 보람이 있다. 많은 것을 잃었다 해도 괜찮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내가 태어나 했던 모든 행위 중 가장 가치있는 일이었다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랬다.
연말 모임합니다. ^^ 놀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