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돼 있다. 그러다 보니 주관이라는 틀에 맞춰서 타인을 해석하려 들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 잘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못되게 굴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어야만 하니 말이다.
누구나 선하면서도 악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좁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척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떤 한 부분이 두드러지면 그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못 박아 두고 미워해야 하므로, 그래서 그 사람을 고립시키고 싶었으니 말이다.
선운사에서 만난 동백꽃. 11월에 방문했는데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니. 가을에도 동백이 필 수 있나 보다.
한참 전의 일이다. 나와 인연이 없던 인간 하나가 갑자기 내 인생에 툭 튀어 들어왔다. 그 바람에 온갖 추악한 단어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며칠을 내리치던 더러운 언어의 맺음은 나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해주겠다는 저주로 마무리 됐다. 그 악담엔 자기가 겪은 상실감을 나에게 덮어버리려는 고약한 심보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 사람과 직접 대화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돌연 사라졌다. 나를 마치 잘 안다는 듯이 말해놓고는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자신이 탐내던 것을 내가 갖게 돼 부정적인 감정에 나름 대응하고 있던 것이었다.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진 공허함과 자신이 초라해 보일 것이라는 망상은 거짓 과시를 위해 허구의 세계를 계속해서 창조해 냈다. 그러나 너무 급조했던 것일까, 자신은 지금 매우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산다는 허위는 그 사람의 바람과는 달리 금세 들통나고 말았다. 좌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발악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날카롭기보다는 버둥댐에 가까웠다.
거짓과 거짓의 실이 엉켜 스텝이 꼬일 때마다 그 사람은 버럭 화를 내곤 했다. 그렇게 분풀이하는 것으로 고통을 이겨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나는 그날의 일에 물음표를 붙인 뒤, 가끔가끔 꺼내서 들여다본다. 그때 나는 미숙함과 천박함이 단어를 습득했던 것 같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지장보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지장경을 읽기 전엔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용서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장경을 읽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아직 용서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점을 이해하고 가엽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까지는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나 중심의 생각에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관점이 지장경 덕분에 생겼다. 물론, 깊은 이해와 용서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 했다. 그래도 이젠 그날의 사건에 물음표만을 붙이지는 않는다.
선운사의 가을.
지장경을 읽다가 너무 감동해서 우와~하고 소리친 대목이 있다. 바라문의 딸이 어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공양했을 때 무간지옥에 같이 있던 모든 중생이 복을 받아 천상계에 다시 태어났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얼마나 순수하고 간절히 빌었으면 그 마음이 커지고 커져서 다른 이들도 구해줄 수 있었을까. 나라면 나쁜 사람들도 갑자기 무임승차로 천상계 고속열차를 타고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라문의 딸은 그 소식에 감격하며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지장보살이 되었다. 타인을 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에서 벗어났기에 모든 이에게 마음을 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나를 옭아매고 있는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사진출처 : 국가유산포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거미줄이라는 단편이 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극락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는데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이 보였다. 중생의 무리 중에 어떤 이가 보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문득 생각에 잠긴다. 그 사람은 도둑질과 방화를 일삼았지만 딱 한 번 착한 일을 한 적이 있다. 길을 가다가 거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밟아 죽이려다가 작더라도 생명을 죽이면 안 된다면서 살려준 일이 있던 것이다. 그의 인생에 딱 한 번의 선행이었지만 그걸로 지옥에서 구원해 줘도 된다는 생각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은색 거미줄을 하나 내려보낸다. 거미줄을 본 남자는 드디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줄을 잡고 위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래를 보니 지옥에 있던 무수한 중생들이 자기가 잡은 거미줄을 보고 기어오르는 게 아닌가. 거미줄은 너무도 약해서 자기 하나만 잡고 오르기에도 힘든데 여러 사람이 오르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사람들을 발로 밀며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그때였다. 거미줄이 뚝 끊어지며 사람들이 다시 지옥에 빠졌다. 자기만 생각하는 남자의 무자비함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벌이 내려져 거미줄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 중생은 이렇게 어리석은 존재다. 그러니 지장보살이 얼마나 바쁘겠는가. 열심히 중생을 구제해서 이제야 깨닫나 싶으면 스스로 죄를 지어서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니 말이다. 구해주고 또 구해주고 또 살펴줘야 하는 것이 중생이라니. 내가 사는 인간 세계야말로 삼악도가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지장보살께서는 중생을 구해주신다. 한량없는 이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도솔암 마애불
오래전에 남편과 선운사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도솔암 마애불 배꼽에서 비기를 꺼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비기에는 무엇이 적혀있었을까, 쿵푸팬더에 나오는 용의 전사만 볼 수 있는 문서처럼 아무것도 안 써져 있던 것이 아닐까 하며 말이다. 그런데 남편의 말은 달랐다. 그날 우리는 일본에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지장보살상을 보며 얘기를 했다고, 표지판에 사진도 있고 설명도 있어서 같이 얘기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 기억은 백지상태가 돼 있었다. 어떻게 같은 장소에서 같이 무언가를 봤는데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것일까. 그때 찍어온 사진을 보니 도솔암 마애불, 동백꽃이 다였다. 아, 그때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담고 와서 이런 일이 발생했구나 싶다. 내 모든 것이 내 안에 갇혀있는데 지장보살을 어찌 친견하고 왔겠나. 그저 스쳐 지나간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다시 지장보살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이젠 대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의 불안정을 인정하고 나라는 세계를 파괴할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