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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아직은 엄마가 읽어 줘야 하는 시기.

- 많이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by 재하

내가 어렸을 적엔, 24시간 만화만 나오는 채널이 없었다. 채널이 5개밖에 없었다고 하면 딸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현대를 사는 인간이 구석기시대 사람 보는 눈빛이랄까? SBS가 개국하는 날, 채널이 하나 더 생겼다고 신나 하며 티브이를 본 얘기를 했더니 엄마는 정말 슬픈 시대를 살았구나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나는 그때가 정말 그립다. 채널 수가 적고 한 번 놓치면 볼 수 없다는 환경은 나에게 계획 짜기와 기다림, 아쉬움이라는 단어들을 배우게 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 아침밥을 먹으며 봤던 TV 유치원 하나 둘 셋과 혼자서도 잘해요는 아침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저녁 4시에서 6시 사이 즈음 나오는 뾰로롱 꼬마 마녀와 세일러문은 나에게 최고의 도파민을 제공해주는 친구였다. 그래도 심심한 시간은 많아서 동화책에 흠뻑 빠져 살았다. 단군신화는 100번 봐도 어찌나 재밌는지 처음 읽었던 그 감동을 매번 선사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24시간 만화만 나오는 채널이 수두룩하고, 휴대폰을 들면 보고 싶은 영상이 쏟아져 내린다. 자연스레 대화가 줄고 책과 더더욱 멀어졌다.

나는 지금까지도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인지라, 집에서도 매일 책을 끼고 산다. 어려운 단행본과 논문에 파묻혀 살다가 에세이집이라도 읽게 되는 날이 오면 너무 재밌어서 잠을 줄여가며 책을 붙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알아서 책을 잘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에 휩싸인 날이 있었다.


아이가 글이 많은 책을 멀리하는 모습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도서관에 가서 대출증을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아이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출증 만들기는 쑥스러워서 실패하고 왔다.


며칠 뒤, 도서관 이용 방법에 관한 설명을 듣고 만들어진 대출증을 확인하는 수업이 있었다. 다행이다. 그 수업 아니었으면 영원히 대출증을 못 만들 뻔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대출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책을 빌리려고 하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왔다. 이유는? 대출 불가 도서인 만화책만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싶어서 도서 구입 신청을 했다. 만화로 된 그리스로마신화를 말이다! 그것도 10권이 넘는 책이었다! 만화책이라도 좋으니, 그저 낄낄거리고 시간을 때우는 책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머리에 남는 책을 봤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 유명한 일타 강사도 그리스로마신화나 삼국지처럼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스토리가 다양하게 얽힌 글을 많이 읽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올레! 이거다!


신간 도서가 오자마자 아이는 그리스로마신화 1권을 빌렸다. 책을 다 읽은 뒤, 재밌다고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으로 향한다. 다행이다! 그리스로마신화를 계속 들고 다니다 보니 1학년 친구들도 계속해서 빌려가 도서관 서가에서는 보기 힘든 책이 되었다. 입소문은 더 빨리 퍼져서 그리스로마신화는 도서관 인기 대출도서에 여러권 올라가게 됐다. 뿌듯하다. 하하.


1학기에 책과 친해졌으니 이젠 글이 좀 있는 책으로 넘어가도 되겠다 싶어서 책을 좀 사줬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이는 책장만 넘기고 글은 읽지 않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어?라고 하면 몇 페이지까지 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들통이 난 뒤, 엄마를 왜 속였냐고 물으니, 책을 읽긴 힘들고 엄마한테 칭찬은 받고 싶어서 그랬다고 한다.


줄글을 회피하던 아이는 슬슬 도서관에도 가지 않았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서는 만화책이라도 보려고 오는 아이들은 정말 기특한 아이들이라고 얘기하셨는데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는 한 학기에 한 번 진행되는 도서관 행사 주간에만 도서관에 갔을 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도서관이 4층에 있어서 너무 힘들다는 핑계와 함께 말이다. 그렇게 2학기는 줄글 전환 대실패기로 마무리됐다. 혹시라도 책과 멀어질까 봐, 아이가 좋아하는 에그박사 책은 집에서 신나게 읽도록 해줬다. 그렇게 2학년이 됐다.

나는 책읽는 방법을 배운 기억이 없다. 내가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도 그저 줄거리만 줄줄 꿰고 있었지 독후감을 쓸 수 있는 실력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책읽고 나서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엄마랑 같이 읽는다고 바로 흥미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 포도알 스티커 붙이기를 감행했다. 30권을 읽으면 사고 싶은 것 사주기! 보상 심리를 이용한 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와는 전래동화와 탈무드 시리즈를 읽었다. 중간중간 그림책도 많이 보았다. 그렇게 포도알 30개가 완성됐고 딸이 원하는 카피바라 인형을 사줬다. 그 뒤엔 숫자를 더 늘려서 포도알에 도전해 보자고 했더니 아이가 대뜸 60개를 외쳤다. 지금은 연못에 오리 스티커를 붙이며 60마리 오리를 모으는 중이다. 신기했던 것은 아이가 책을 읽고 나서 오리 스티커 붙이는 것을 까먹는 날이 왔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제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 한 줄 독서록 쓰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60개의 오리 스티커를 다 붙이면 자기가 좋아하는 백유연 작가의 그림책 시리즈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총 8권으로 돼 있는 책인데 그림도 예쁘고 내용도 재밌다. 세상에, 나는 그 나이에 좋아하는 작가가 없었는데 딸아이는 생기다니 놀랍다. 나보다 백배는 나은 것 같다.

아이가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잘 말하지 못할 때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 인터넷에 널려있다. 제목이나 주인공, 장소를 바꾼다면 어떨지와 같은 것이다. 그 정보가 도움이 많이 됐다. 쓸데없이 그림이 예뻤어와 같은 대답을 하는 날에는 인터넷에서 봤던 질문을 던지며 어떻게든 내용을 파악하고 느낀 점을 말할 수 있도록 내비게이션이 되어주었다. 덕분에 아이는 학기 초보다 훨씬 그럴싸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됐다.


어른들이 말한다.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이다. 아니다.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한 권을 여러번 읽더라도 제대로 읽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대학원 수업에서는 책을 읽고 내용을 파악한 뒤, 저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텍스트를 붙들고 치열하게 토론한다. 시사적인 내용을 가져와서 응용한 뒤 답을 할 수도 있지만 그전에 해야 하는 것은 행간에 숨기고 있는 작가의 의도다. 이것이 올바른 독서법 중 하나라면 내가 아이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책을 읽고 내용을 파악한 뒤, 느낀 점을 잘 끌어낼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처럼 그림이 예뻤어요와 같이 책 내용과 상관없는 감상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그러니, 저학년 때는 올바른 독서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엄마가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해 주는 것이 맞다. 이 작업은 저학년 때 끝내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그렇지않으면 중학생이 된 뒤, 독서 전환기에 다시 참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마표 독서에서 독립을 할 수 있도록 3년간 부지런히 훈련시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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