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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만화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라!

- 에그박사에서 최재천의 동물대탐험으로!

by 재하

하루는 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갔더니 둘째가 급식을 먹고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저렇게 바쁜가 싶었는데 학교 도서관으로 내달린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보려고 저렇게 뛰어가나 싶어 하교한 아이를 잡고 물어봤더니 유튜버 만화였다. 내용을 물어봤다가 더 놀랐다. 학습적인 내용이 없을뿐더러, 유의미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열심히 간다고 해서 기뻐했더니 집에서 못 보는 유튜브를 책으로 접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도서관에 열심히 가게 만들어줬으니 당장 만화책을 보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급하게 초등학생 책 읽기에 관한 전문가의 의견을 찾아봤다. 학습만화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것과 동일한 뇌의 반응이 있다거나, 문해력 등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책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WHY 시리즈 정도는 허용해 줘도 괜찮다는 내용도 있었다.


딸에게 WHY 시리즈를 읽어보라고 서점에서 펼쳐줬더니 싫단다. 이미 강력한 도파민에 노출된 상태여서 그런지 설명 형식의 만화가 들어올 리 없었다. 이걸 어쩐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딸의 손에 에그박사가 들려있다. 투명비닐로 꽁꽁 감긴 책의 뒤표지를 보며 이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도 에그박사 책에는 동물에 관한 유익한 내용이 가득했다. 아이가 한 번 보고 덮어버리는 책이 아니라 10 회독, 20 회독까지 하는 만화였다. 에그박사 정도면 허용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이와 전래동화책 시리즈를 열심히 읽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한 줄 독후감 쓰기 숙제가 주어져서 책을 같이 읽은 뒤, 아이가 독후감을 어떻게 쓰는지 지켜봤다. 와우, 정말 엉망이었다. 아이는 작문을 할 줄 모르는 상태가 확실했다.


“용기를못내는것같다고생각해도포기하지않고달려야된다라고생각해야겠다.”


띄어쓰기는 고려대상도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아이는 자신이 숙제를 엄청 잘했다는 착각에 씩 웃으며 나에게 보여줬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엄마가 알 수가 없어, 이런 걸 비문이라고 해.”

“비문이 뭐야?”

“문장이 아니라는 거야.”


아이는 그때부터 작고 동그란 눈물을 또르르 흘리기 시작했다. 칭찬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잘못 썼다고 하니 얼마나 슬펐을까.


아이가 한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같이 일기를 썼었다. 일곱살 때였다. 오늘 일어난 사실만 나열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작문이 됐다. 1학년 때 학교에서 그림일기도 썼는데 매주 써오는 그림일기의 내용도 알찼다. 그런데 독후감이 왜 비문의 향연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작문만의 문제인지 다른 문제인지 아이를 관찰하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아이의 문제점을 알게 됐다. 아이는 다새쓰 방정환 문학 어린이심사단에 위촉돼 글만 있는 동화 작품 2편을 읽고 심사를 했다. 표지도 하얗고 본문에도 그림 하나 없이 줄만 이어지니 내용을 파악하는데 엄청나게 힘들어했다. 어찌어찌 심사해서 보냈고, 한참이 지나 재밌는 삽화와 함께 대상을 받은 작품이 책으로 완성됐다. 그제야 아이가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아~ 아직 글보다 그림에 익숙한 상태구나, 그래서 책을 읽은 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말해보라고 하면 계속해서 그림 얘기를 했던 거구나!

그때부터는 글이 많은 전래동화와 탈무드 말고도 그림책을 많이 보았다. 그림에 익숙한 아이에게 글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그림에서 글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열심히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는 백일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글이 아주 많이 들어간 최재천의 동물대탐험도 혼자 척척 읽을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독후감도 혼자 잘 쓴다. 매우 진부하고 기본적인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글쓰기 기술은 내년까지 계속해서 알려주면 될 것 같다.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이니 말이다.


친한 언니가 국어학 전문가여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가끔가끔 물어봤다. 그때마다 언니는 지독을 권했다. 묻고 묻고 또 묻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아이의 생각이 자라날 테니 한 번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설명해 줬다. 그 뒤, 아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본다. 그런데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의 상상력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하루는 딸과 함께 언니를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셨는데 정말 엄청난 장면을 발견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경전철이 지나는데 언니가 그걸 보고 저 귀여운 열차는 뭐냐고 물어본 것이다. “저거 없음 저 서울 못 나가요, 제 발이죠.” 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딸에게 물었다. “엄마가 왜 저걸 엄마의 발이라고 했을까?” 그렇게 아이에게 계속 질문을 했고 이런 걸 이동수단이라고 부른다고 개념 정리까지 해줬다. 약 30분 동안 경전철 얘기만 하는데도 대화의 내용이 풍부했다. 아, 저렇게 질문을 해야 하는 거구나!

아이에게 내가 질문을 던지면 답이 잘 안 나온다. 생각하는 작업을 매우 귀찮고 괴로운 작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라서 그런지 몰라도 언니가 물어볼 때와는 태도도 매우 다르다. 그래도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 몫이라고 여기고 생각날 때마다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언니가 나에게 추천해 준 작업이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역사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식물도감을 만들 수도 있으니 그걸 딸과 해보라는 것이다. 아이가 박완서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그날이 오면 엄마는 박완서 작가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고난을 생생히 묘사하여 그 어떤 논문보다 날카롭게 정면을 조준한 소설은 없을 거라고 얘기해 줘야지. 엄마는 박완서 작가를 정말 좋아한다고 두 번 세 번 말해줘야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공유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근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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