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글을 아주 일찍, 빨리 깨쳤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운영하시던 식당이나 가시던 미용실이었을까 짐작되는데 백과사전같이 두껍던 옛날 잡지 ‘여성동아’ 같은 잡지를 매일 들여보다 어느 날부터는 읽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누가 가르쳐 준 적도 배우게 한 적도 없다. 지금 만 두 살인 딸아이를 보자니 나는 한 서너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내 유년을 정확히 지켜봐 준, 나를 곱상하게 오래 키워준 사람도 없어 혼자 여성동아를 보다, 마광수의 소설도 읽었고, 어른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온갖 책을 읽던 기억을 곱씹어 본다.
여섯 살의 어린 나에게 넌 커서 무엇이 될 거냐 물었다면
열두 살의 나에게 넌 커서 무엇이 될 거냐 물었다면
열일곱의 나에게 넌 커서 무엇이 될 거냐 물었다면
스물셋의 나에게 넌 뭘 하고 싶냐 물었다면
서른아홉의 지금 나에게 넌 꼭 뭘 할 거니 하고 묻는다면
난 글 쓰는 사람이 될 거야 라는 똑같은 말을 했고 해 왔고 하고 있다.
내가
내가 되어 가는 과정과 시간을 운명, 이라고 얘기한다면
쌓이고 쌓인 습작 노트들과
그 위로 놓인 셀 수 없이 모은 찢어진 어느 종이 한 장의 코너에 적어 놓은 이야기와 문장들과
내가 끈끈하고 지릿하게 버텨온 시간과 환경들 속에 하고 싶어진 혹은 할 수 있게 된 이야기들은
운명의 파편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