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와 페소아의 도시, 리스본

한 도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

by 심루이


1.

이른 아침, 포르투 호텔 앞에서 울려 퍼지던 따뜻한 기타 연주를 들으며 마지막 도시 리스본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문학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도시, 리스본. 스위스 철학자 파스칼 메르시에가 쓴 소설이 원작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어를 가르치며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던 그레고리우스 교수는 출근길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구하며 그녀가 쓰는 언어인 포르투갈어에 관심을 갖는다. 서점에서 우연히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남자가 쓴 포르투갈 책, <언어의 연금술사>까지 발견한 그레고리우스는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학교장에게 쓴 편지에는 '저는 이제 긴 여행을 떠납니다. 언제 돌아올지,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될지 저도 아직 모릅니다.'라고 적고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인용한다. 이 소설의 백미는 그가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으며 리스본까지 당도하는 과정에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숨이 턱에 차서 자리에 앉았다. 기차가 이룬을 향해 출발하자 제네바에서 그를 엄습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무척이나 명료하며 매우 현실적인 이 여행, 시간이 흐르고 역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그를 지금까지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이 여행이 계속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기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본에서 프라두의 발자취를 쫓아가면서 잃어버렸던 열정을 서서히 되찾는 그레고리우스. 모범적이기만 하던 그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버린 건 아주 사소한 사건과 우연히 만나게 된 책 한 권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들린 연남동 독립 서점 <서점 리스본>도 이 작품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점을 운영하는 정서정 대표는 한 권의 책을 따라 새로운 세상으로 훌쩍 떠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처럼 책을 통해 우리 각자의 마음, 잃었던 빛을 찾고 사랑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서점 이름을 리스본이라 지었다고 한다.

KakaoTalk_20230301_161158136_01.jpg 리스본행 오전열차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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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여행 (61).jpg 낭만과 활기의 리스본 시내


2.

리스본의 첫인상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세비야에서 리스본을 경유할 때 착륙 직전 창문으로 리스본 시내를 유심히 보던 심이가 나를 흔들어 깨우며 했던 한 마디도 "엄마, 여기 언덕이 정말 많아, 신기해"였으니. 카몽이스 광장 근처에 있던 숙소도 가파른 경사에 위치하고 있었다. 짐을 풀고 리스본 시내를 걷다 보니 과연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도시다웠다. 세상을 거대한 놀이공원으로 재편해야 한다면 롤러코스터 역할은 리스본에게 맡기면 좋을 것 같았다. 편한 운동화가 든든했다.


영어로 리스본, 포르투갈어로 리스보아. 고대 페니키아어로 '좋은 항구'라는 뜻을 가진 단어, '리스보아'의 발음이 어찌나 좋던지, 나는 몇 번이고 그 단어를 되뇌이며 걸었다. 트램과 푸니쿨라를 자주 만날 수 있는 리스본은 어딜 찍어도 그림처럼 나오는 곳이었다. 활기와 낭만이 동시에 있었다. '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리스본을 떠나 중국까지 간 어느 누구보다 강렬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여행에 매우 회의적인 문장을 써 내려간 리스본의 유명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의 독자에게 리스본 여행을 권하며 <페소아의 리스본>이라는 책을 썼다. 도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도시를 소개하는 여행안내서를 쓰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래 잊혔던 이 원고는 페소아 사후에 한 궤짝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출간되었고 2023년 우연히 리스본을 여행하게 된 나에게까지 왔다.


80개가 넘는 가명으로 글을 쓴 페소아는 생전에 시집 한 권만을 출간했을 뿐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마흔일곱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발견된 그의 방대한 원고들이 그를 유명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특히 20년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안의 책>은 자기 자신과 내면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게 하는 지점이 많은 명작이다. 카몽이스 광장을 걸으며 페소아를 생각했다. 페소아가 자주 가던 카페 <A Brasileira> 앞에 그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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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여행 (10).jpg 페소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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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스본에 가면 가장 먼저 가고 싶었던 곳은 '코메르시우 광장'이다. 리스본의 상징과도 같은 이 광장의 끝에는 바다처럼 넓은 테주강이 펼쳐져 있다. 세상의 끝이 아니지만 마치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광활함이다. 광장 한가운데 위치한 커다란 기마상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 개선문을 닮은 아우구스타 아치 전망대로 향했다. 이 전망대에서 광장과 그 너머 테주강의 탁 트인 광경을 한눈에 담으니 오래전 육지 너머를 꿈꾼 포르투갈 사람들의 열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들에게 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겠지. 페소아가 즐겨 식사를 한 레스토랑인 <마르티뉴 다 아르카다>를 거쳐 광장 모퉁이로 향했다. 이 식당은 무려 1782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광장 모퉁이의 작은 노점에서 리스본의 대표 체리주, '진자냐'를 한 잔씩 마시고 리스본 시내를 내려다 보기 위해 또다른 전망대인 '포르타 두 솔'로 향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진짜 리스본 사람들도 꽤 많이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은 덤이었다. 헥헥거리며 도착한 전망대에서 주황색 지붕으로 가득한 알파마 지구와 테주강, 상 조르주성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뒤로는 노란 전차가 계속 지나갔다. 리스본 풍경을 담은 엽서를 꼭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바로 이 풍경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포르투갈에서 무용수와 가이드로 동시에 활약하고 있는 한선비님은 13년 전 알파마 언덕에 올라 내려다 본 리스본 정경에 반해서 당시 함께 여행하던 남자친구와 무작정 이곳에서 살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여전히 포르투갈에서 살고 있는 선비님의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전망대 근처를 걸었다. 한 도시를 오래, 직접 부딪히며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애정과 현장감이 동시에 묻어났다.


페소아에게 리스본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베이징이 그랬던 것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도시를 가지는 행운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페인여행 (185).jpg 코메르시우 광장
스페인여행 (163).jpg 포르타 두 솔 전망대에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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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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