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세상의 끝

낭만과 활기의 리스본

by 심루이


1.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포르투갈어 책을 번역한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55p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가 아닌 아름다운 무음과 특별한 우아함.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순간에 어떤 결정들은 우리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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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리스본 여행에 필수적인 것이 리스보아 교통 카드다. 버스, 트램 등 교통 수단을 무제한으로 이용하고 몇몇 관광지도 무료로 혹은 할인해준다. 두 번째 날은 이 카드를 이용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벨렘 지구에 들리고, 리스본 명물인 28번 트램과 푸니쿨라까지 타기로 했다.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버스로 25분 정도 달리면 나오는 벨렘지구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에그타르트(포르투갈에서는 '나타'라고 부른다)가 있다. 바로 1837년부터 5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파스테이스 드 벨렘>의 달콤 바삭한 에그타르트다. 에그타르트가 맛있어 봤자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한 입 베어물어보니 이 정도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낯간지러운 평가를 받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하면 <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에서 권호영 작가는 '벨렘 지구의 그 맛있다는 에그 타르트를 먹고 나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을까.


이 에그타르트의 시작은 바로 옆에 위치한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빳빳한 수녀복을 위해 계란 흰자를 이용하고 남은 노른자로 수도사들이 개발한 과자가 바로 나타다. 이곳의 비밀 레시피를 아는 사람은 3명 밖에 되지 않으며 이들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절대 한 기차나 비행기에 타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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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항해 시대를 빼놓고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때 세계를 풍미했던 찬란한 시대를 기억할 수 있는 건축물이 바로 벨렘지구의 발견기념비와 벨렘탑이다.


52미터 높이에 달하는 발견기념비는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해양왕 엔리케의 사후 500년을 기념해 세워졌다. 엔리케 왕자를 중심으로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 희망봉을 항해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소, 최초로 콩고강에 도착한 디오구 캉 등 다양한 서른 두 명의 개척자를 만날 수 있다. 실제로 보면 오밀조밀 서있는 사람들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벨렘지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은 테주 강변에 세워진 벨렘탑이었다. '테주강의 귀부인'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벨렘탑은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이 탑의 쓰임은 다양했는데 드나드는 이들을 감시하는 요새이자, 탐험가들의 전진 기지이면서 한 때 자유주의자들을 가둔 감옥이기도 했다. 지하에 사람들을 가두고 만조 때마다 차오르는 물로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바라보는 벨렘탑은 더욱 미묘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벨렘탑 중앙에는 뱃사람들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한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그 시대의 탐험가들은 머나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기 전 성모상 앞에서 무사귀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빌고, 탐험이 끝나고 다시 돌아올 때 아주 멀리서 벨렘탑을 바라보며 안도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벨렘탑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벨렘탑은 한 번에 관람할 수 있는 인원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어 기다림이 짧지 않지만 꼭 한 번 들르기를 권한다.


빡빡한 일정을 쪼개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신트라 성과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인 호카곶까지 가보려고 했으나 비가 부슬부슬 오는 데다 추워서 포기하고 리스본 시내를 더 걷기로 했다. 여행이 끝나고도 호카곶을 가지 못한 것이 짙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 아쉬움은 카몽이스가 이곳에 대해 적은 시 구절을 몇 번이고 읽게 했다.


-여기,/땅이 끝나는 곳./그리고 다시 바다가 시작되는 곳.


끝없이 펼쳐진 푸른 대서양, '세상의 끝'이라고 적힌 호카곶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남은 내 생의 버킷리스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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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주라는 긴 여행의 마무리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리아 푸니쿨라와 비카 푸니쿨라에게 맡기기로 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온 곳으로 리스본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 뻬드로 알칸타라 전망대 옆에 100년 역사의 글로리아 푸니쿨라가 있다. 리스본의 낭만을 책임지겠다는 듯 매일 좁은 골목을 바쁘게 오르내린다. 푸니쿨라를 직접 타는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지만 역시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멋지다. 리스본 정경과 어우러진 푸니쿨라는 잊을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게 각인되었다.


마지막 점심은 숙소 근처의 로컬 식당 <Casa da India>로 정했다.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업무를 시작하기 전 와인을 한 잔 즐기는 활기찬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뭐 이리 질투나는 근무 환경이 있단 말인가. 열두시 땡, 식당이 오픈하자마자 자유분방하고도 멋스러운 아저씨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바에 앉는다. 중저음 보이스로 '늘 먹던 걸로'라고 주문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합석 문화가 자연스럽고 시끌벅적한 이곳에서 먹은 숯불에 구운 치킨과 깔라마리, 올리브오일과 화이트 와인에 볶은 조개와 드라이 화이트 포트 와인이 3주 간 이어진 이베리아반도 미식 기행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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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든 호텔을 '취소 불가'로 예약할 때 '과연 우리가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혹시 중간에 무슨 일이 생겨 하루 이틀 정도 놓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일정이 계획대로 마무리됐다.


이 여행이 무탈하게 끝나가고 있음에, 우리 셋의 기억 속에 비슷하고, 다른 이야기가 심어졌음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 여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은 시간이 차차 알려주겠지.


페소아는 <불안의 책>에서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적었다. 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 낯선 여행지의 정거장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린다. 어쩌면 모든 여정(=여행과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유명한 관광지나 '다른 누구'가 아닌 나의 심연, 나의 마음일 것이다. 구글맵을 보며 걷든, 마음의 지도를 따라 서성이든 여행의 끝에 만나는 것은 더 적나라하고 생생한 내 자신일 뿐.


페소아의 말처럼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이미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어떻게 찾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스스로를 더 이해하도록 노력할 것, 스스로에게 더 친절할 것, 내 안에 있는 것을 찾아내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 중요한 결정과 다짐들은 아주 조용하게 우리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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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 친구 같은 남편 춘, 친구 같은 딸 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당신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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