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할까?

순수함에 관하여

by JJ

사람들은 왜 드라마에 열광할까?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주제, 배우들도 비슷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드라마에 빠지는 건 스토리가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첫사랑.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듯이 나도 첫사랑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첫사랑이 아무리 드라마틱해도 변변치 않은 나의 첫사랑이 가장 소중한 법이다.

순수: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순수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다. 지천명이 되어 순수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니, 순수하다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 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나이가 적어도 온갖 패륜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많아도 천진스럽고 해맑게 사는 어른들이 있다.






30년 전쯤의 이야기다.

그녀는 대학생이었고 나는 재수를 하던 때였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그녀. 남, 녀가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있다 보면 없던 감정도 생긴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불륜이 종종 일어나는 가 보다. 불륜은 안된다. 이성적 감정이 생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컨트롤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이다.


좋은 감정이 싹트기 전에 봉쇄해야 한다. 그것이 파탄을 막는 길이다. 가족을 해체시면서까지 그들의 사랑이 위대한 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랑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특별하고 위대한 사랑처럼 느껴 느껴질지 모르지만 착각이고 환상이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또 새로운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그녀는 나의 이상형도 아니었고 특별한 매력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하다 보니 좋은 감정이 싹트고 정이 든 것 같다. 그때는 한가롭게 연애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어서 만남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놓치면 안 된다는 절박함과 애절함도 없었기에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헤어져야 했다. 그녀는 내게 자주 선물을 주었는데 기억에 남는 선물이 가수 윤상의 LP 레코드판이다. 아직도 집안 한 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 시절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윤상의 노래들. 아르바이트를 그 만두고 간헐적으로 서로의 안부를 전했으나 우린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열정적이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반전도 없는 흔한 첫사랑. 너무 사랑해서 못 잊는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정말 순수한 감정으로 나를 좋아했다.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지금도 느껴진다.






순수하면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친구 S다. 그는 요즘 미모의 필리핀 여성과 연애 중이다.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지인의 소개로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필리핀 중산층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인데 결정적으로 어린아이가 두 명 있는 한 부모가정의 엄마였다. 그 들의 만남을 보며 주위 사람들은 억측과 편견으로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궁금해하고 앞날을 걱정해주기도 한다. 타지에서 살 수 있겠냐는 둥, 그 감정이 오래 가겠냐는 둥의 이야기를 한다. 걱정은 고마운데 친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S는 오로지 그 녀만 믿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미 양가(兩家)에 인사도 드렸고 이제 필리핀에 정착을 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에만 몰입하면 된다.


S는 대한민국에서 많은 여성들을 소개받았지만 그녀들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삶에 대한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이다. 그 녀들은 너무 복잡한 생각과 복잡한 마음으로 살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한 갈등이 반복되다 보니 연애와 결혼에 대해 회의감의 들고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필리핀의 그 녀를 선택했고, 흔들리는 인생이라는 파도에 휩쓸려서 필리핀으로 간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의 삶은 어떤가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순수함을 잃은 지 오래다. 눈동자는 흐릿하고 영혼도 혼탁하다. 마음도 복잡하다. 한 가지 상황에 수십 가지의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생각하고 고민한다.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가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복잡한 삶이다. 필리핀에 가서 단순 명료하고 마음 편하게 살겠다는 S가 부럽기도 하다. 삶이 매일 낭만적일 순 없겠지만 한 번쯤은 바닷가에 누워 코코넛 열매 따먹으면서 별을 보고 싶다. 한 가지 서운 한 것은 혈육(血肉) 같은 친구를 이제 자주 볼 수 없다는 것.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지금은 지금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은 세월이 흐른 만큼의 순수함이 사라졌지만 또 그만큼의 지혜와 혜안(慧眼)이 생겼다고 믿는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겠지. 그래도 순수했던 그때가 그립긴 하다.

S.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다.



윤상 "이별의 그늘" 1990

박주연 작사, 윤상 작곡, 노래 윤상

https://youtube.com/watch?v=BxlrBHoLVlo&si=FAIj1LnfN6MLRX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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